대마(對馬)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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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대마 |
한글표제 | 대마 |
한자표제 | 對馬 |
대역어 | 대마국(對馬國), 대마도(對馬島), 대마번(對馬蕃) |
관련어 | 유천일건(柳川一件),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 삼포왜란(三浦倭亂), 기해동정(己亥東征)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지명 |
지역 | 일본 |
집필자 | 장순순 |
이칭 | 대마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마(對馬)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년 6월 9일, 『세종실록』 1년 6월 19일, 『세종실록』 1년 6월 20일, 『선조실록』 40년 1월 5일, 『고종실록』 6년 12월 13일 |
일본 구주(九州)와 한반도 사이에 위치하는 섬.
개설
일본 장기현(長崎縣)에 속한 가장 큰 섬(남북으로 82㎞, 동서로 18㎞)으로, 총면적은 708.25㎢이다. 2010년 기준으로 인구는 34,116명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장기현에 속해 있으나, 일상생활은 교통 편의상 복강(福岡)현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구주 본토와는 132㎞, 한반도와는 49.5㎞ 떨어져 있어 한반도와 가깝기 때문에 예로부터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지리적 위치를 이용한 조선과의 무역으로 생활을 해왔다. 대마국(對馬國)은 율령제하에서 국(國: 구니)에 준하는 취급을 받았던 것에 기초한 호칭이다.
자연 환경
지세는 현재에도 87%가 산림으로, 경작지는 3.3%에 불과하며, 해안선의 대부분은 리아시스식 해안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서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승문시대(繩文時代) 초기부터 고분시대(古墳時代)의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위지(魏志)』「왜인전」에는 3세기에는 이미 1,000여 호의 주민이 있었고, 생산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주민은 어업과 교역으로 생계를 마련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이러한 주민들의 생활 형태는 많은 미생시대 유적에서 한반도 계열의 유물이 동시에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대부터 은산지로 알려졌다. 그러나 중세에는 쇠퇴하였다가 근세 초기에 다시 부흥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였다.
형성 및 변천
일본에서 율령제가 실시되었을 때, 대마는 대재부(大宰府)의 관할 하에 놓였다. 견수사(遣隨使, 遣唐使) 모두 대마를 기항지로 삼았으며, 한반도와 일본의 왕래도 모두 대마를 경유하여, 대륙과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 들어서, 겸창막부(鎌倉幕府) 시절에는 대마 수호직(守護職)을 소이씨(小貳氏)가 담당하였다. 종(宗)씨는 소이씨의 수호대(守護代)로 대마에 들어와 점차 세력을 넓혀 무사화하였으며, 그때까지 대마에서 세력을 가지고 고려와 교역을 행하고 있었던 아비류(阿比留)씨를 토벌하여 대마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겸창막부가 쇠약해지자, 대마는 왜구의 근거지의 하나가 되었고, 1366년 고려왕조가 왜구 단속을 종씨에게 요청하면서, 종경무(宗經茂)와 고려의 통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왜구는 그치지 않았고, 1389년에는 경상도순문사박위(朴葳)가 이끄는 고려군이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여 전함 300여 척을 불태웠다. 왜구의 활동이 다시 활발하게 되자, 조선 태종은 1419년 대마를 정벌하였다. 이를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년 6월 9일)(『세종실록』 1년 6월 19일)(『세종실록』 1년 6월 20일).
일본에서는 겸창막부가 쇠락하고 남북조시대를 거쳐 실정(室町)막부가 전개되었다. 1433년, 소이씨가 대내씨(大內氏)에게 패배하여 대마로 도망하였으므로, 소이씨와 종씨는 구주에서의 기반을 잃어버렸다.
1443년(세종 25)에는 조선과 대마도주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였는데, 이로써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자들은 종씨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는 동시에 종씨의 영국 지배(領國支配)가 대마에서 확립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대마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은 교역에 있었으므로 종씨가 독점적으로 인정받은 무역권은 가신단(家臣團)을 편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6세기가 되면 조선의 통교무역제한 방침과 대마 주민의 무역확대 요구 사이에 모순이 격화되어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이후 통교무역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종씨는 권익회복에 노력함과 동시에 섬 밖의 통교무역자의 이익에도 집중하여, 16세기 후반에는 조선과의 통교무역권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1587년 풍신수길(豐臣秀吉)이 구주를 평정하자, 종씨는 신종(臣從)을 서약하여 이전과 같이 영지를 허락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종의지(宗義智)는 장인이었던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침략에 앞장섰으며, 이로서 조선과의 무역도 단절되고, 섬은 피폐해졌다. 1600년, 관원(關が原) 전투에서 종의지는 서군에 가담하였으나, 서군이 패배하자 그 후 덕천가강의 사면을 받아 조선과의 국교회복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607년에는 막부에 대하여 조선의 제1차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파견되었으며(『선조실록』 40년 1월 5일), 1609년(광해군 원년)에는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면서 무역이 정식으로 재개되고, 부산에는 두모포 왜관이 설치되었다. 그 후 1635년에 국교회복 과정에서 국서를 위조한 일 등이 문제가 되어 번주인 종의성(宗義成)과 가신 유천조흥(柳川調興)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조일 간의 외교는 대마에 맡겨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장군(將軍)덕천가광(德川家光)이 유천조흥의 패소를 결정함[유천일건(柳川一件)]에 따라 일본의 대조선 외교교섭은 대마로 일원화되고, 대신 막부는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를 실시함으로써 막부의 감독을 강화하였다. 이정암윤번제란 경도(京都) 오산(五山)의 승려를 1년 내지 3년의 윤번으로 대마부중(對馬府中)의 이정암에 거주시켜 조선과의 왕복문서에 관한 일을 관장시킨 제도였다. 후에는 통신사의 접대에 관한 일도 이정암의 승려가 담당하였다. 이로써 대마를 매개로 하는 한일 외교 관계가 정착되었다.
강호시대(江戶時代)에 대마번은 100,000석의 가격(家格)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대마의 영토에서는 쌀 4,500석, 보리 15,000석 정도의 수입에 불과하였고, 은광 채굴과 조선과의 무역을 통하여 이를 확충하였다. 이후, 종씨는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다는 가역을 배경으로 대전(田代) 등 구주에 땅 30,000석을 가증(加增)받았고, 그 외에도 막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내었다.
1858년 덕천막부는 서양 5개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막부의 개항 정책 하에서 대마에 개항장이 생길 것이라고 판단한 종의화(宗義和)는, 이봉운동(移封運動)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성공하게 되면, 구주의 새로운 영지 100,000석에 전대(田代) 등에 있는 비지(飛地) 30,000석, 광산 40,000석,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결국은 자신들이 담당하게 될 것이므로 30,000석을 계산하여 합계 200,000석 내외의 신분이 될 것이라고 가신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1862년 양이운동(攘夷運動)이 활발해지면서 막부는 쇄국양이를 약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에 대마번에서는 이봉운동이 실패하였다는 인식이 퍼져서 무사들 41명이 무단으로 강호에 나아가, 1862년에 반막부파인 장주번(長州藩)과 동맹을 성립시키고, 번주를 은퇴시킨 뒤 아들인 종의달(宗義達)을 추대하여 가독을 상속시켰다. 이들은 쇄국양이의 상황에서 대마번이 최전선이 된다는 가정 하에 원조 요구를 전개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원조 요구의 논리로 나타나는 것이 ‘막부말기의 정한론’이었다.
1864년에는 장주(長州) 정벌과 막부의 위신 회복으로 대마번에 대한 원조 요구가 중단되었고, 이에 대마 내에서는 위기감이 커져서 좌막파와 토막파의 대립이 발생하였다[갑자(甲子)의 변(變)]. 이때 대마 전체에서 200명 이상의 희생이 있었다.
명치 신정부가 성립되자, 번주 종의달은 무진전쟁(戊辰戰爭)에 참가하여 막부와 싸웠으며, 1869년 판적봉환 때에는 엄원(嚴原)번지사가 되었다. 대마는 1871년 7월의 폐번치현(廢藩置県)에 따라서 9월에는 이만리현(伊万里縣)에 편입되었다가, 1876년 8월에는 장기현의 관할이 되었다.
한편 명치 정부의 성립 이후 한일 간에는 서계 문제가 발생하였다. 서계 내용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외교방식을 조선에 강요하는 것이었다(『고종실록』 6년 12월 13일). 1868년 12월 대마는 대차사(大差使)를 파견하여 신정부 성립의 통고서를 제출하였다. 조선에서는 기유약조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이 서한의 수용에 신중하였지만, 일본의 폐번치현과 청일수호조규의 체결이 확인됨에 따라서 현실을 인정하고 서계를 접수하였는데, 이는 1872년 3월의 일이었다.
이로써 같은 해 9월 외무대승화방의질(花房義質)이 군함을 이끌고 부산항에 입항하여 왜관의 대마 상인들을 철수시키고, 왜관에 외무성 관리를 주재시켰으며, 1873년 2월에는 왜관을 ‘대일본국공관(大日本國公館)’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마를 매개로 하는 근세 한일 관계는 그 역할을 상실하고 새로운 외교 관계가 모색되었다.
장기현 관할로 대마에는 엄원지청(嚴原支廳)을 두었으며, 1886년에 대마 섬 청이라고 개칭되었고, 1926년에는 대마 지청으로 개칭되었다. 명치 일본 정부는 대마도의 요새화를 도모하였다. 1960년대 이후, 대마의 경제는 더욱 쇠퇴하여, 인구의 유출이 심해졌다. 도로의 정비도 충분하지 못하고, 공공사업의 삭감으로 경제는 더욱 궁핍해졌다. 2004년에는 대마의 6정(町)이 모두 합해져서 대마시(市)로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
- 『對馬島誌』, 對馬敎育會, 1928.
- 『新對馬島誌』, 新對馬島誌編纂委員會, 1964.
- 『長崎県史』, 吉川弘文館, 1972.
- 현명철, 『19세기 후반의 대마주와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3.
- 田代和生,『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研究』, 創文社, 1981.
- 田中健夫·石井正敏 編, 『對外關係史辭典』, 吉川弘文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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