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내다다량지세(大內多多良持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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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시대 전기의 영주.

개설

다다량(多多良)은 대내씨(大內氏)의 본성으로 대내씨는 백제 성왕의 왕자인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시조로 하였다. 실정시대 대내씨는 주방(周防)을 본거로 하는 서일본의 대표적인 영주가 되었다. 대내씨는 조선과의 통교시 ‘대내다다량(大內多多良)’을 명의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 문헌에 등장하는 다다량지세 또는 대내다다량지세는 대내지세(大内持世)를 말하였다.

대내지세는 대내씨 10대 당주 대내의홍(大内義弘)의 아들로, 아명은 구랑(九郎)이며, 관위는 초기에는 형부 소보(刑部少輔), 후에는 수리대부(修理大夫)를 지냈다.

내용 및 특징

1431년 대내씨 당주이던 형 성견(盛見)이 구주에서 전사한 후, 대내씨 안에서는 그 후계자를 두고 지세와 지세의 동생인 지성(持盛)을 각각 옹립하려는 세력이 있어 마찰을 빚었다. 막부는 성견의 유지를 근거로 지세를 정식 계승자로 인정하였으나 막부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지성이 1432년 반란을 일으켰다. 지세는 지성 세력을 몰락시키고 가독 계승전에서 승리하여 막부로부터 주방(周防)·장문(長門)·풍전(豊前)·축전(筑前)의 4개국(國) 수호직을 인정받았다. 1433년 막부로부터 구주의 대우씨(大友氏)·소이씨(小貳氏) 토벌령이 내려져 출진, 소이만정(少貳滿貞)·대우지직(大友持直)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구주에서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1434년 소이가뢰(少貳嘉頼)·대우지직이 다시 거병하자 1435년 다시 구주로 출진하여 이를 평정한 뒤에 소이씨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1939년 북구주를 평정한 뒤 본거 산구(山口)로 귀국하였는데, 대내씨의 세력이 확대해 가는 것을 불안히 여긴 장군 족리의교(足利義敎)가 경도로 오도록 명하였으나 이에 불복하여 안예(安藝)의 영지 일부를 몰수당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 온 조선사절을 이용하여 1440년 2월, 대립 관계에 있던 소이가뢰의 사면을 이끌어 내어 소이씨 재건에 힘을 보태었다. 그 이후에는 경도에 머무는 일이 많아졌던 것 같다. 1441년 6월 적송만우(赤松滿祐)가 장군 의교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가길(嘉吉)의 난], 이때 동석하였던 지세도 부상을 입어 7월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내다다량지세(大內多多良持世)의 이름은 1428년(세종 10) 통신사박서생(朴瑞生) 등을 파견하면서 지세에게 서신과 물건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세종실록』 10년 12월 7일). 그런데 이때는 대내성견이 건재했던 때이므로 왜 조선에서 지세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이 기록만으로는 특정할 수 없다. 다만, 이 무렵 성견이 경도에 체류한 일이 많았다는 것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1432년 7월에는 조선에서 ‘대내다다량공(大內多多良公)’에게 서신을 보냈는데(『세종실록』 14년 7월 26일), 이 시기는 지세와 지성 간의 가독계승분쟁이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조선에서 수신인의 정확한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것이 대내씨의 내부 상황을 알고 있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의 여부도 이 기사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부분이다. 참고로 『세종실록』에는 대내씨와 소이씨의 전쟁 상황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정보가 기록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세종실록』 13년 8월 11일).

지세는 소이씨 및 대마도종씨와의 대립 관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였다.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조선 측에 대마도에 대한 협동공격을 제안하고 대마도 할양까지도 고려하였다는 점이다. 지세의 사후인 1444년(세종 26) 대내씨의 가신으로 추정되는 노라가도로(盧羅加都老)가 사신을 보내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이므로, 대내전(지세)도 조선과 더불어 협공(夾攻)하여 대마도를 조선에 돌리고자 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대내전(교홍)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6년 4월 30일). 이는 대마도의 영유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기사인데, 지세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지세가 소이·종씨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조선의 영역으로 하는 조건으로 조선과의 군사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지세는 1436년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대마도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한 적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조선과 대내씨가 대마도를 협공한다는 말이 표사온(表思溫)이라는 향화왜(向化倭)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고 표사온을 단죄하였다(『세종실록』 26년 6월 7일).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학회, 『동아시아의 영토와 민족문제』, 경인문화사, 2008.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藤井 崇, 『室町期大名權力論』, 同成社, 2013.
  • 松岡久人, 『大內氏の硏究』, 淸文堂出版, 2011.
  • 須田牧子, 『中世日朝關係と大內氏』, 東京大學出版会, 2011.
  • 永留久惠, 『武門の興亡と對馬の交隣 (對馬國志 第2巻 中世·近世偏)』, 對馬國志刊行委員会,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