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아산성(唐阿山城)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당아산성 |
한글표제 | 당아산성 |
한자표제 | 唐阿山城 |
동의어 | 당아산성(螗蛾山城), 당아산성(當峩山城) |
관련어 | 느즐령, 시채진(時寨鎭), 완항령(緩項嶺), 임진왜란(壬辰倭亂), 입보처(入堡處)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평안도 창성도호부(현 평안북도 용강군)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8㎞, 높이 5.5m |
관련 인물 | 이유경(李儒敬), 조태로(趙泰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당아산성(唐阿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1월 8일, 『선조실록』 28년 10월 10일, 『숙종실록』 43년 8월 4일 |
조선시대에 서북방 수비를 위해 평안도 창성군의 당아산 일대에 쌓은 산성.
개설
당아산성은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안도 창성군의 수비를 위해 축조한 산성이다. 청군이 쳐들어오면 창성과 삭주(朔州)의 병사들은 당아산성으로 들어가 수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창성에서 구성(龜城)·태천(泰川)·운산(雲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큰 고개인 완항령(緩項嶺)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 변화로 인하여 평안북도 동창군 학송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당아산성(唐阿山城) 외에 당아산성(螗蛾山城) 혹은 당아산성(當峩山城)으로 쓰인 사례도 확인된다.
위치 및 용도
창성은 현재의 평안북도 서북부에 위치하여 있으며 압록강의 중류를 끼고 있다. 창성의 읍치는 강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당아산성이 위치한 당아산은 현재 느즐령이라고도 부르는 완항령을 지난 남쪽에 위치한다. 창성군은 이 완항령을 중심으로 생활구역이 크게 나뉘어 있으며 북한은 행정구역 개편 당시 완항령을 중심으로 창성군을 창성군(昌城郡)과 동창군(東倉郡)으로 분리하기도 하였다. 창성읍치에서 완항령을 지나는 길은 구성·태천·운산이며, 이 길은 다시 영변(寧邊)·안주(安州)로 이어져 평양(平壤)을 거쳐 서울에 이른다. 당아산성은 창성에서 태천·운산으로 가는 길목의 옆에 위치하며 바로 이 길을 수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한 것이다.
당아산성에는 창성과 삭주를 소속시켰으며 변란 시에는 이 두 고을의 군사들이 당아산성으로 들어가 수비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산성 아래의 시경면(時梗面)에는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이름을 시채진(時寨鎭)이라 하고 만호(萬戶)를 두어 군량을 마련해 비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군량은 순영(巡營)·병영(兵營) 및 창성의 별비곡(別備穀)으로 사용되었다. 영조 때에 당아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수차례 축성이 이루어졌으며 아예 창성의 읍치를 당아산성 안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성안이 좁고 또 강변과 너무 떨어져서 강변 수비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영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변천 및 현황
1414년(태종 14) 처음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변의 약산성(藥山城), 운산의 청산성(靑山城), 자산(慈山)의 자모산성(慈母山城)이 조선초기의 기록에서 보이는 반면, 당아산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운산의 청산성이 변란이 일어날 경우 창성과 벽동(碧潼)의 군사가 들어갈 곳으로 정해져 있고(『문종실록』 1년 1월 8일), 창성에서 구성에 이르는 길에 성이 없다는 지적으로 보아(『선조실록』 28년 10월 10일) 당아산성은 임진왜란 직후까지 수비하는 군사가 없거나 적어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아산성이 주목된 것은 1675년(숙종 1)에 이르러서이다. 이때 창성과 삭주의 군과 백성이 전란 시에 몸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인 입보처로 지목되고 시채진(時寨鎭)을 설치하여 군량을 갖추도록 한 것으로 보아 비로소 당아산성이 군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717년(숙종 43) 전 평안감사(平安監司)조태로(趙泰老)가 상소하여 다시 수축하였고(『숙종실록』 43년 8월 4일), 이어 창성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기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영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1746년(영조 22) 이전 다시 수축되었으며 창성부에 살던 교생(校生)과 향품(鄕品) 등 부류를 봉감교원생(烽監校院生)이라 이름하여 옮겨와 산성을 지키게 하였다. 1799년(정조 23)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이유경(李儒敬)이 산성 북쪽의 700여 보(步)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형태
동·남·북면은 산마루를 따라 성을 지었으며 서면은 당아천에 의해 이루어진 낮은 산마루를 따라 쌓았다. 동·북면은 자연 절벽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둘레는 8㎞이며 성벽의 높이는 5.5m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이계집(耳溪集)』
- 나경준, 『조선 숙종대 관방시설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조선유물유적도감편찬위원회,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황부연, 「조선후기 산성 수축과 운영의 재정구조」, 충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http://www.cybernk.net/)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