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량(唐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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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중국에서 수송해 온 군량미, 혹은 모문룡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각 도에 추가 징수한 결세.

개설

임진왜란 당시 중국에서 수송해 들여온 군량미를 흔히 ‘당량(唐糧)’이라고 하였다. 또한 1618년(광해군 10) 이후 명의 지원군 요청과 모문룡(毛文龍)의 주둔에 대응하기 위해 각 도에 매 결당 1두 5승씩을 더 거두어 서쪽 변경으로 운반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당량이라 하였다. ‘서량(西糧)’, ‘모량(毛糧)’이라고도 불렀다.

내용 및 특징

1592년(선조 25)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빌미로 왜군이 조선에 침입해 들어오면서 조선과 명·일본 사이에 교전과 강화 협상이 7년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량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해 수송해 온 곡식을 일컫는다.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에는 왜군이 이미 서울까지 진격하여 올라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명나라의 지원군에게 공급할 군량미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군량을 중국에서 직접 수송해 와 의주에 비축해 두었는데, 명나라 군사가 양남(호남, 영남)에 주둔하면서 의주에 비축해 두었던 당량도 남쪽으로 이전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군산을 경유하여 금강에 배를 정박시킨 후 명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에 군량미를 수송하도록 하였다. 또 강화도에 당량을 옮겨 보내서 독운어사(督運御使)로 하여금 강화 이남에 군량이 필요한 곳에 운송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경상도의 경우 왜군의 진격로에 군량미를 비축하여 왜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운송에 신경을 썼다(『선조실록』 26년 8월 19일)(『선조실록』 31년 4월 10일).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당량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1618년 명에서 후금을 치기 위해 지원군 수천 명을 징발하도록 자문이 내려 온 후(『광해군일기』 10년 윤4월 26일), 1622년(광해군 14)에는 명의 장수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아예 주둔하면서 조선 정부에 군량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양서 지방, 즉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별도의 결세(結稅)인 토지세를 추가로 거두어 이를 모문룡의 진영에 바쳤다. 모문룡의 군대에 지급하는 군량이라 하여 모량, 혹은 양서 지방의 양곡을 바친다 하여 서량이라고도 불렀다.

변천

1634년(인조 12)에 갑술양전(甲戌量田)으로 삼남의 토지 결수가 늘어나고 병자호란 이후 군량으로 소비되는 곡식이 감소하자, 오결가포(五結價布)와 군수목(軍需木), 조예가포(皁隷價布)와 같이 토지에서 추가로 거두었던 결세가 모두 혁파되었다. 하지만 서량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인조실록』 19년 6월 9일). 그러다가 1646년(인조 23) 무렵 4도에서 거두는 서량을 특별히 없앤 이후로 점차 폐지되었다(『인조실록』 23년 9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권내현, 『조선후기 평안도 재정연구』, 지식산업사, 2004.
  • 김옥근, 『朝鮮王朝 財政史 硏究(6)―踏驗定額稅制의 展開過程 分析』, 丁中煥博士還曆紀念論文集刊行委員會, 1974.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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