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踏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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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흥인문에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지역을 말하거나 넓은 들판이 주변에 포진된 지역을 이르는 말.

개설

답십리(踏十里)는 도성의 동쪽인 흥인문(興仁門) 외부에 위치한 동교(東郊)의 한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흥인문에서 10리 정도 걸어가면 있는 곳이라고 해서 답십리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본다. 조선 건국 초기에 이성계의 부탁을 받은 무학(無學) 대사(大師)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궁궐 자리를 답사하던 시기에 이 지역을 행보한 거리가 10리였다는 설에 의한 해석이다. 답십리 동쪽에 위치한 왕십리와 같이 넓은 들판이 이어지고 있어서 부르게 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흥인문부터 중랑천을 경계로 답십리에 이르는 곳은 대부분 들판이다. 답십리라는 말 그대로 들판이 사방 10리에 펼쳐진 곳이라고 할 만하다. 태종대부터 살곶이[箭串] 근처에서 사냥을 하거나 사복시(司僕寺)의 목장이 설치될 정도로 목초가 많은 평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자연적 특징에 맞추어 지명이 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명칭 유래

조선초기에 무학 대사가 왕도를 정하려고 도성에서 10리 떨어진 이곳을 밟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자연 환경

흥인문에서 중랑천까지 이어지는 평지이다. 서쪽에 남산, 남쪽에 응봉, 동쪽에 청계천, 북쪽에 개운산이 있다.

형성 및 변천

1788년(정조 12)에 도성내 각 부(部)의 방(坊)과 계(契)의 명칭을 정하면서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에 답십리계(踏十里契)를 소속시켜 관리하게 하였다(『정조실록』 12년 10월 16일).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한성부 동서(東署)의 답십리가 되었다.

위치 비정

남산에서부터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는 안쪽에 위치한다.

관련 기록

왕이 살곶이다리로 행행할 때 거치는 지역이었다. 1789년(정조 13)에 정조는 이곳이 매우 평탄하다고 평가하였다(『정조실록』 13년 8월 2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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