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종인(譚宗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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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일본군과의 강화교섭에 참여했던 명의 장수.

개설

임진왜란 중 벽제관 전투의 패전 이후 명은 점차 일본과 강화를 추진해나가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특히 군량 문제가 명이 강화교섭을 진행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명의 심유경(沈惟敬)은 웅천에 있던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접촉하며 일본의 입장을 조율하며 강화교섭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593년(선조 26) 담종인은 명의 지휘(指揮)로 심유경 대신 소서행장 진영에 그대로 남아 소서행장 측의 요구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다가 1595년(선조 28) 빠져나왔다(『선조실록』 28년 8월 4일). 이후에도 일본과의 교섭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가계

정확한 가계는 알 수 없으나 사촌인 담풍시(譚馮時) 역시 담종인과 함께 강화협상에 종사하였다(『선조실록』 27년 3월 7일).

활동 사항

담종인은 명의 지휘(指揮)로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소서행장의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담종인은 강화파였던 심유경과 함께 전쟁을 끝낼 강화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흠(申欽)에 따르면 담종인은 심유경을 대신하여 1593년 12월에 웅천에 있던 소서행장의 진영에 들어갔다고 하며 그곳에 3년간 남아 있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는 일본 측에 의한 억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담종인이 일종의 소식 전달서인 품첩(稟帖)을 올려 소서행장 진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그의 부하 역시 오고 갔던 것을 보아 일방적인 억류라기보다는 심유경과 소서행장 양측의 이해관계에 따라 소서행장의 진영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담종인은 웅천에서 강화교섭을 진행하였으며 강화에 따라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고 이들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1595년 소서행장 진영에서 빠져나와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후에도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군의 사정을 살피고 강화교섭의 실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민덕기, 「조선후기 조·일강화와 조·명관계」, 『국사관논총』12,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조원래,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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