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원춘(譚元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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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 경릉파를 대표하는 문장가.

개설

담원춘은 고향 사람인 종성(鍾惺)과 함께 새로운 문학사조를 표방하였으며, 이들은 경릉파(竟陵派)로 불리었다. 경릉파의 시문학은 당시 문단을 지배하던 의고파(擬古派)의 사조에 반대하고, 고시(古詩) 및 당시(唐詩)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여 주목을 받았다.

활동 사항

담원춘은 호북성(湖北省) 경릉(竟陵) 출신으로, 담사옹(譚蓑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20세에 고향 선배인 종성과 뜻을 함께하였다. 당시(唐詩)를 모방한 복고풍의 의고파가 주도하던 경향에 반대하고, 경릉파를 결성하였다. 담원춘과 종성을 함께 일컬어 종담(鍾譚)이라 칭하였다.

그들은 반(反)복고주의를 내세우며 고시 및 당시에 대한 전통적 평가를 폐기하고, 독자적인 감상을 통한 과거 시인들의 시에 담긴 순수한 정신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종성과 함께 『시귀(詩歸)』를 편집하였는데, 이 책의 여러 곳에 평어(評語)를 실어 옛 시인의 문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어 놓았다.

담원춘은 남경(南京)·소주(蘇州)·항주(杭州)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명 말기 복사(復社)운동에 참여한 인물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는 10여 년간 호남성(湖南省) 상중(湘中), 호북성(湖北省) 악서(鄂西) 지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기도 하였다. 『초유오룡담기(初游烏龍潭記)』 외 5편의 여행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1627년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계속 낙방하여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637년 52세의 나이에 북경(北京)에 회시를 보러 갔으나 병으로 죽었다.

18세기 조선후기의 문단에서는 새로운 문학 기풍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16세기 초반 명나라 반의고파의 조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정약용(丁若鏞)은 상소에서 “어린 시절 서학 및 잡학에 대하여 가졌던 헛된 관심”에 대하여 자책하며, 담원춘 등 명말청초 시기의 학자가 일찍이 깨달은 것이라고 평가하였다(『정조실록』 21년 6월 21일).

저술 및 작품

『담우하합집(譚友夏合集)』, 『명시귀(明詩歸)』, 『송문귀(宋文歸)』, 『시귀(詩歸)』, 『시촉(詩觸)』, 『우장(遇莊)』, 『위소주집(韋蘇州集)』

묘소

천문현(天門縣) 자죽대(白竹台). 현재의 호북성 천문시(天門市) 황담진(黃潭鎮)에 있다.

상훈 및 추모

담원춘과 종성이 모두 죽은 후, 천문현에 두 사람을 합사하고, ‘천하문장(天下文章)’ 네 글자를 현판으로 내걸었다.

참고문헌

  • 이수웅, 『중국문학사』, 다락원, 2001.
  • 임종욱, 『중국의 문예인식: 그 이념의 역사적 전개』, 이회, 2001.
  • 김의정, 「명대 녀성 시인 왕미의 여행시」, 『중국어문학지』 39, 2012.
  • 박재경, 「18세기 조선 문단의 명말청초 문학 인지 양상」, 『동방한문학』 54, 2013.
  • 이철희, 「경릉파에 대한 조선후기 비평 양상」, 『어문연구』 153,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