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부(潭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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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담양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담주(潭州)로 개칭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설치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담주도단련사를 폐지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5년(태조 4)에 담양현을 담양군으로, 1398년(태조 7)에는 다시 담양부로 승격시켰다. 1409년(태종 9)에 담양부가 관할해 오던 1현 1부곡을 담양부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 담양부가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담양부가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광주진에 속했다. 1678년(숙종 4)에는 담양부가 금성산성(金城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을 맡아 관장하였다. 1728년(영조 4)과 1762년(영조 38)에 역모 사건이 일어나 두 차례 담양부가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나중에 복구되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에 포군을 설치할 때, 담양부에 포군 25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담양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95년에 추성군(秋成郡)을 담주(潭州)로 고치고 도단련사를 둔 것으로 되어 있다. 1018년에 담주도단련사를 없애고 담양군이라 개칭하였으며, 이때 담양군을 율원현(栗原縣), 창평현(昌平縣)과 함께 무주(武州) 소속에서 나주목(羅州牧) 관할로 변경하였다. 조선 개창 후 1395년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담양현을 담양군(潭陽郡)으로 승격시켰다(『태조실록』 4년 1월 27일). 1398년에는 덕비(德妃)의 외가(外家)라는 이유로 다시 담양군을 담양부(潭陽府)로 승격시켰다(『태조실록』 7년 11월 6일). 그 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담양부가 관할해 오던 1현 1부곡이 폐지되고 담양부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현은 원율(原栗)이고, 1부곡은 정석(貞石)이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담양부에 종3품 부사(府使) 1인과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경국대전』에는 담양도호부사는 종4품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한다고 규정되었다. 담양부사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부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부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600년(선조 33)에 담양부사를 무신 중에서 임용하는 방안에 대하여 논의한 적이 있었다(『선조실록』 33년 10월 10일). 이것은 담양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추성지』에 따르면 6방과 관원이 250인이었는데, 훈도 9인, 공생(貢生) 35인, 사령(使令) 18인, 군졸 20인, 관노 71인, 주탕(酒湯) 35인, 수급비(水汲婢) 18인이었다. 『호남읍지』에는 담양부사 1원이 금성진(金城鎭)의 수성장을 겸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좌수 1인을 두었는데 1895년에 향장(鄕長)으로 바뀌었다. 그 밖에 향청에 별감 3인을, 금성진에 별장(別將) 1원을 두었다.

변천

1413년에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로 읍호(邑號)를 고친 뒤 담양의 영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서로 인접한 창평현과 담양부 사이의 경계를 조정하는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1435년(세종 17)에 전라도감사민심언(閔審言)이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창평현이 땅도 좁고 백성도 적을 뿐만 아니라 창평 관내의 장평(長平)과 갑향(甲鄕)이 구획을 뛰어넘어 담양부의 경내에 들어갔으니, 창평을 담양에 합쳐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세종실록』 17년 7월 22일).

1728년(영조 4)에는 담양부의 읍격(邑格)이 현으로 내려갔는데,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역적 박미구(朴美龜)가 태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1738년(영조 14)에 다시 담양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762년(영조 38)에도 담양부가 현으로 강등되었는데, 이때는 역적 이홍범(李弘範)의 출생지였기 때문이다. 그 뒤 1771년(영조 47)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영조실록』 47년 1월 2일). 그런데 『증보문헌비고』에는 담양부 승격 시기가 1772년(영조 48)으로 되어 있어서 1년 차이가 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담양부를 비롯하여 화순·창평·진원을 전라도 나주도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광주도 그중 하나이다. 담양을 비롯하여 장성·진원·창평·화순·동복·능성이 전라도의 광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충좌위의 우부(右部)에는 나주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담양이 속한 광주진은 나주진관으로 편입되었다.

1678년(숙종 4)에 담양과 순창이 금성산성(金城山城)의 관장을 둘러싸고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담양을 수성장으로 삼고, 순창을 협수장(挾守將)으로 삼아 수성장의 명령을 받도록 조치하였다(『숙종실록』 4년 11월 23일).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담양부에 포군 25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담양부가 폐지되었다. 같은 해에 감영과 안무영 등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담양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담양군지』, 담양군지 보정판 발간위원회, 2002.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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