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복위(端宗復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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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단종복위 |
한글표제 | 단종복위 |
한자표제 | 端宗復位 |
동의어 | 상왕복위(上王復位)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사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돈 |
발생시기 | 1456년(세조 2) |
관련 인물/집단 |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사육신(死六臣)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단종복위(端宗復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세조실록』 2년 6월 2일,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
1456년(세조 2) 6월, 사육신(死六臣)을 중심으로 세조에 의해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시도한 사건.
개설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죽고 12세인 단종이 1452년에 즉위하였다. 문종이 영의정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김종서(金宗瑞),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단종의 왕위를 보호하도록 유언을 남겼다고는 하나 왕권은 취약하였다. 1453년(단종 1) 10월에 발생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고명대신(顧命大臣)은 제거되고 수양대군, 즉 후일의 세조가 일거에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1455년 윤6월에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를 엿보던 중 1456년 6월에 거사하였으나 밀고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단종복위는 실패하였다.
역사적 배경
단종복위는 적장자에 의해 순리적으로 이루어지는 ‘종법적 방식’으로 이미 굳어진 왕위 승계를 또다시 힘을 바탕으로 한 ‘패권적 방식’으로 뒤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 제기였다. 이 거사의 주동자들은 왕조의 수성기(守成期)에 접어든 상황에서 무력을 바탕으로 강압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나이 어린 군주인 조카를 협박하여 왕위를 물려주도록 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찬탈 행위라고 간주하였다. 단종복위에 담겨 있는 정신을 흔히 ‘절의(節義)’라고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조의 즉위를 ‘찬탈(簒奪)’로 본 것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둘러싼 그 어떤 사건보다 여기에 가담한 인물들은 유교적 명분이나 정통성의 측면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 사건과 연루되어 초래된 그 모든 참혹하고 처절한 결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종의 적장자인 단종은 워낙 어린 나이였고, 자신의 치세를 당당하게 끌고 나가기에는 주변 세력이 너무 취약하였다. 이 때문에 불행히도 단종은 처음부터 왕위를 넘보는 인물인 수양대군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1452년(문종 2)에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는 3년간 재위에 있은 뒤 1455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7세인 1457년(세조 3)에 죽었다. 단종이 즉위할 당시 숙부 수양대군을 비롯해 7명의 대군(大君)이 포진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뒤(『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무단적이고 전제적인 공포 분위기를 통해 15세인 조카 단종을 협박하고 양위(讓位)를 강요하여 1455년(단종 3)에 즉위하였다.
단종복위의 발생 요인은 왕위 승계의 문제와 관련해 살펴볼 때 무엇보다 종법적 방식을 근간으로 한 왕위 승계 방식의 근본적 한계와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세종·문종·단종을 거치면서 종법적 방식이 왕위 승계의 근간이 되고 있었으나 패권적 방식으로 이를 거스를 경우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은 없었다.
또한 이 거사는 왕권 강화를 넘어 심지어 전제적 권력의 행사로 이어진 육조직계제의 체제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이 거사의 적극적인 참여자들이 대부분 언관화 또는 정치 기관화된 전·현직 집현전 관원이었고, 거사 실패 후 곧바로 세조는 이들의 언관화 성향을 제거하기 위해 집현전까지도 혁파하였다. 그리고 단종복위 사건의 특징으로 이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신속한 처벌과 처벌 내용의 잔인함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세조의 왕위 승계가 정통성과 명분, 그리고 도덕성의 결여 등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세조 자신의 불안감과 극단적인 가학 증세의 반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발단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단종복위의 거사를 모의한 것은 1455년(세조 1) 10월경이었다. 명나라의 책명사(冊命使)가 조선에 오는 일정에 맞추어 진행되어, 1456년 6월 1일 창덕궁에서 개최될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2품 이상의 무관(武官)이 칼을 차고 왕의 좌우에서 호위하는 운검(雲劒)을 서는 것을 이용해 세조와 그 일파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운검의 참석이 제외되면서 이 거사는 실행 직전에 취소되어 일단 보류되었다. 그런데 거사의 모의에 참여했던 성균사예(成均司藝)김질(金礩)이 그의 장인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정창손(鄭昌孫)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는 실패하였다(『세조실록』 2년 6월 2일).
경과
단종복위와 관련해 죽음을 당한 인물은 그 후 절의의 표상으로 간주되면서 숭상을 받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791년(정조 15)에 절의 숭상의 범위를 넓혀 단종에게 충성을 다한 신료들을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수록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렸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참고문헌
- 김돈, 「세조대 ‘단종 복위 운동’과 왕위 계승 문제」, 『역사교육』98, 2006.
- 이근호, 「16~18세기 ‘단종 복위 운동’ 참여자의 복권 과정 연구」, 『사학연구』83,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