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군(丹陽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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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단양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단양군(丹陽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충주목에 속한 군이다. 고려 1319년(고려 충숙왕 5)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5세기에 235호, 인구는 724명이었다. 군종은 시위군(侍衛軍) 26명, 선군(船軍) 26명이었다. 토지는 1,169결인데, 이 중에 논은 112결에 불과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 관할이 되었고, 1914년에 영춘군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단양은 삼국시대에는 적산현(赤山縣) 또는 적성현(赤城縣)이었다.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적성을 빼앗아 영토로 삼았고, 통일신라시대에 한주(漢州) 내제군(內堤郡)의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에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쳤다. 1018년(고려 현종 9)의 지방제도 개혁 때 원주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충주로 이속(移屬)하였다. 13세기에 원의 반란세력인 합단(哈丹)의 침입 때 현민 고을 사람들이 용감하게 저항해서 적의 침공을 막아, 그 공을 기려 감무를 설치하였다. 1319년(고려 충숙왕 5)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공민왕 때는 단산부로 승격시킨 적도 있었다. 그 후 다시 군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군을 유지하였다.

단양은 남한강을 끼고 있으나 산지에 위치하여 토지가 척박하고 주민들이 가난하였다. 온달산성과 적성·단양 적성비의 존재가 말해 주듯이 삼국시대에는 죽령을 넘어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요지였으며, 소백산맥의 방어와 한강 상류의 수로를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전략적 요충지였다. 신라는 적성을 확보하면서 마침내 소백산맥을 돌파하였고, 수로를 이용해 한성까지 진출하면서 단숨에 백제와 치르던 전투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런 이유로 단양의 행정구역 변천은 전란과 관련이 깊다. 외침이 적었던 조선시대에는 죽령길과 남한강 수운을 유지하는 교통 및 조운상의 요지로서 더 큰 기능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음서 출신자를 수령으로 임명하는 곳이 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관속은 조선후기의 통계로는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20명, 아전 24명, 지인 14명, 사령 27명, 관노 31명, 관비 12명이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동동면, 서서면 등 대개 방위 명을 딴 7개 면이 있었다. 군의 규모는 후기에는 논이 222결 52부로 약간 늘었지만 밭이 927결 53부, 토지 총액은 1,150결 5부로 거의 변함이 없었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을 기준으로 호는 2,052호, 인구는 남자 3,231명, 여자 1,513명이었다. 1895년에 충주부 관할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14년에 영춘군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단양군지(丹陽郡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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