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현(丹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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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단성현(丹城縣)은 기존의 강성현(江城縣)과 단계현(丹溪縣)이 통합되어 조선시대 1436년(세종 18)부터 불렸던 명칭이다. 고려시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강성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단계현을 겸임하였다. 조선초기에 거제도로부터 임시로 내륙에 들어와 있던 명진현(溟珍縣)도 통합하여 1399년(정종 1)부터는 강성현을 진성현(珍城縣)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면서 명진현의 주민들은 거제도로 돌아갔으며, 1436년에는 강성현과 단계현을 완전히 통합하여 단성현이 되었다. 조선시대 단성현에는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단성현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에 산청현(山淸縣)에 통합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에 복구되었다. 1703년(숙종 29)에는 옛 강성현 읍치로 중심지를 옮겼다가 1731년(영조 7)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1895년(고종 32)에 단성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단성군이 폐지되고 그 영역은 산청군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단성현은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단성현은 기존의 강성현과 단계현이 합쳐져서 1436년부터 불렸던 명칭이다. 강성현은 신라궐지군(闕支郡)에서 기원하였으며, 경덕왕 때 궐성군(闕城郡)이 되어 2곳의 영현(領縣)을 거느렸다. 고려초에 강성현이 되었다가 이후에 강성군이 되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晉州)에 내속하였다. 이후 다시 강성현이 되었으며, 1390년(고려 공양왕 2)부터 감무가 파견되었다. 단계현은 신라적촌현(赤村縣)에서 기원하였으며, 경덕왕 때 단읍현(丹邑縣)으로 개명하여 궐성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초에 단계현이 되었고, 1018년에 합주(陜州)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1390년에는 새로 감무가 파견된 강성현에 이속되었다.

고려말에 왜구의 침략으로 거제도의 주민들이 내륙으로 이주하였는데, 거제현(巨濟縣)의 속현인 명진현의 주민들은 진주의 속현인 영선현(永善縣) 지방에 임시로 기거하였다. 이에 1399년(정종 1)에 강성현과 명진현을 통합하여 진성현으로 개칭하였다가(『태조실록』 7년 12월 20일), 명진현의 주민들이 거제도로 돌아간 뒤 1436년에 강성과 단계 두 현을 합쳐 단성현이라고 개명하였다(『세종실록』 18년 2월 4일).

조직 및 역할

단성현의 모태는 강성현과 단계현이다. 신라시대에 강성현은 강주(康州) 소속인 궐성군으로 당시에는 군태수(郡太守)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으며, 단계현은 궐성군의 영현으로 당시에는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강성군은 진주의 속군(屬郡), 단계현은 합주의 속현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두 곳 모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두 고을 모두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강성현에는 1390년부터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었고, 강성현감무는 단계현을 겸임하였으며, 거제도에서 임시로 옮겨 온 명진현의 주민들까지 함께 다스렸다. 그런 까닭에 1399년에 고을명이 진성현으로 변경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으로 개칭하였고, 1436년(세종 18)에 비로소 단성현감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단성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단성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조선후기의 지리서인 『단성현읍지(丹城縣邑誌)』에 의하면 단성에는 6품의 문관, 무관, 혹은 음관이 현감으로 임명된다고 기록되었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단성현은 1436년에 성립한 이래 별다른 변화는 없었으나, 이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어 1599년에 산청현에 통합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복구되어 내산(來山)의 아래에 읍치가 두어졌다. 그런데 조선전기에도 내산이 읍치 북쪽 1리에 있었으므로 복구된 읍치는 이전에 단성현의 읍치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702년(숙종 28)에 강성의 옛터로 읍치를 옮겼다가 1731년(영조 7)에 다시 내산의 옛터로 돌아왔다. 강성의 옛터는 현재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일원으로 내산의 읍치 터인 현재 성내리 바로 북쪽에 위치한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단성군으로 변동되어 진주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단성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단성군은 폐지되고 그 영역은 산청군에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에 단성현의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에 위치하였고, 1702년(숙종 28)~1731년(영조 7)에는 바로 이웃한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에 위치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단성현읍지(丹城縣邑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