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법석(楞嚴法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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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능엄법석 |
한글표제 | 능엄법석 |
한자표제 | 楞嚴法席 |
관련어 | 능엄법회(楞嚴法會), 능엄도량[楞嚴道場], 능엄강회(楞嚴講會), 능엄경(楞嚴經), 능엄신주(楞嚴神呪), 아비라기도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능엄법석(楞嚴法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종실록』 1년 3월 13일, 『태종실록』 8년 6월 23일, 『태조실록』 4년 4월 17일, 『태종실록』 2년 5월 8일 |
재앙이 사라지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빌기 위해 『능엄경』이나 능엄신주를 염송하는 불교 의식.
개설
능엄법석(楞嚴法席)은 재앙의 뿌리가 소멸되고 근심 걱정이 사라지며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빌기 위해 『능엄경(楞嚴經)』이나 능엄신주(楞嚴神呪)를 염송하는 의식이다. 유사한 의식으로는 밀교식 의례인 능엄도량[楞嚴道場], 현교식 의례인 능엄법회(楞嚴法會)·능엄강회(楞嚴講會) 등이 있다. 『능엄경』은 705년 당나라에서 번역되어 8세기 초에 신라에 전해졌으며, 고려시대에는 능엄도량과 능엄강회가 열렸다. 조선초기의 경우 능엄법석은 칠칠재의 법석으로 2회, 능엄법회와 능엄회는 각각 1회씩 개최되었다. 이후 국가적인 차원의 능엄법석은 사라졌으나, 불공이나 기도를 올릴 때 능엄신주를 염송하는 신앙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원
능엄법석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능엄경』은 중국 당나라 때인 705년에 반랄밀제(般剌蜜帝, Pāramiti)가 광주(廣州)의 제지사(制旨寺)에서 번역한 『대불정여내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을 줄여 부르는 명칭이다. 수선(修禪)·이근원통(耳根圓通)·오음마경(五陰魔境)에 대하여 선법(禪法)의 요의(要義)를 설명하고 있다. 음녀(淫女)의 환술에 걸린 아난을 구제한 부처가 진실과 허망을 구분하는 바른 관찰과, 계율의 이행 및 능엄주의 지송 등을 설파한 경전이다. 부처가 이 경전을 설한 목적은 중생들로 하여금 능엄주에 의지해 악마의 장애를 물리치고, 부지런히 참선에 정진해 여래의 진실한 지혜를 얻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변천
『삼국유사』에 실린 「남백월이성노힐부득달달박박(南白月二聖努肹夫得怛怛朴朴)」은 『능엄경』 ‘관음원통설’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설화이다. 이 설화로 미루어 볼 때, 8~9세기 무렵 신라 사회에서는 이미 『능엄경』을 신앙하고 독송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인 11세기 말에 의천(義天)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는 27편의 『능엄경』 관련 연구서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능엄경』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1089년(고려 선종 6) 왕궁의 선덕전(宣德殿)에서, 1276년(고려 충렬왕 2)에는 강양 범계사에서 능엄도량이 개설되었다. 그뿐 아니라 『능엄경』을 강설한 기록도 보인다. 1121년(고려 예종 16)에 이자현이 청평사에서 『능엄경』 강회(講會)를 개설했고, 1265년(고려 원종 6)에는 승려 보환이 귀로암에서 『능엄경』을 강설하였다. 또 1278년(고려 충렬왕 4)에는 왕명으로 백련사에서 능엄강회가 열렸다.
조선시대에도 능엄법석이 설행되었으나, 그 목적은 이전과 약간 달랐다. 고려시대의 능엄법석은 재앙을 물리치기 위한 호국 법회의 성격이 강했던 반면 조선시대의 능엄법석은 망자 천도를 위한 법회의 성격이 강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능엄법석은 1399년(정종 1)에 태조가 관음굴에서 개최한 것으로(『정종실록』 1년 3월 13일), 당시 관음굴은 고려왕씨의 추천을 위한 수륙도량이었다. 이어 1408년(태종 8) 6월에는 태조의 빈전에서 5재의 법석으로 능엄법석이 개설되었다(『태종실록』 8년 6월 23일). 이처럼 조선초 왕실에서 개최한 능엄법석은 주로 망자의 추천(追薦)을 위해 설행되었다.
한편 1395년(태조 4)에는 회암사에서 왕사 자초(自超)가 능엄회를 베풀었고(『태조실록』 4년 4월 17일), 1402년(태종 2)에는 태조가 소요산에서 능엄법회를 베풀며 타인의 접견을 금하였다(『태종실록』 2년 5월 8일). 이때의 능엄회나 능엄법회는 능엄신주를 염송하거나 『능엄경』을 강설하는 법회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 이후에는 국가나 왕실 차원의 능엄법석 또는 능엄도량은 더 이상 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능엄신주를 염송하는 것은 사찰에서 시행하는 권공 의식 후반의 풍경(諷經) 의식으로 정착되었다.
이같은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에도 설행되는 대표적인 능엄신주 염송 법석으로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아비라기도가 있다.
절차 및 내용
『능엄경』 권7에는 도량을 짓는 법, 수행자가 수행하는 방법, 능엄신주 등이 교설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수행의 방법으로서 몇 가지 지켜야 할 법규가 있다. 먼저 내면으로 지켜야 할 법규에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갖지 않으며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4계가 있다. 또 외면으로는 능엄신주를 108번 독송해야 한다. 그리고 사방의 경계를 맺어 도량을 건립해, 시방[十方]의 국토에 현재 머무는 무상여래가 관정해 주기를 구해야 한다.
능엄법석은 『작법절차(作法節次)』에 따라 설행된다. 우선 천수주 등을 읽어 도량을 깨끗하게 정화하고, 부처를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경전을 염송한다. 『능엄경』은 총 10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3일 또는 5일 동안 매일 정해진 편수의 경전을 읽는다. 제7권에 있는 능엄신주만 독송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계청 의식을 행한 뒤 곧바로 염송을 시작한다.
『오대진언집』의 능엄신주 계청 의식에는 능엄신주의 공덕이 실려 있다. ‘광명대불정여래만행자수능엄’에 머리를 숙이며 능엄신주를 염송하고 다라니를 듣기만 해도 그 위력이 불가사의하여, 한량없이 많은 죄와 장애가 모두 청량하게 되고 한 번만 들어도 영원히 천상에 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
- 『작법절차(作法節次)』
- 서윤길, 『한국밀교사상사』, 운주사, 2006.
- 문상련, 「한국불교 경전신앙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