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정(籠山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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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창덕궁 후원의 옥류동에 조성한 살림집 형태의 정자.

개설

농산정(籠山亭)은 창덕궁 후원의 깊은 계곡에 위치하여, 왕이 쉬어 가거나 재숙하던 곳이었다. 단순한 휴식 공간뿐 아니라 신하들의 학문을 시험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농산(籠山)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라는 뜻으로, 정자 주변의 산세를 묘사하였다. 농산정의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깊은 계류인 옥류천(玉流川) 계정에 위치하였다. 헌종 때 편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농산정이 취한정 서북쪽에 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취한정은 농산정과 마찬가지로 옥류천 계정에 위치한 정자들 중 하나이다.

옥류천 계정에는 농산정을 비롯하여 청의정(淸漪亭),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취한정(翠寒亭)의 5개 정자들이 서로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형성하였다. 그중 농산정은 일반적인 정자와 달리 온돌방과 마루를 함께 갖추어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작은 부엌이 있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이는 왕이 후원 깊숙이 나들이 나와 예상치 못한 궂은 날씨를 만났을 때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세 차례나 농산정에서 재숙하며 밤을 보냈으며(『정조실록』 16년 3월 18일),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정조실록』 19년 2월 25일). 순조대에 농산정에서 임시시험의 일종인 응제(應製)를 실시한 것으로 보아, 농산정은 단순한 휴식 공간을 떠나 왕이 신하들의 학문을 시험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농산정을 언제 지었는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연산군이 미희(美姬)와 노닐던 곳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연산군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대에 옥류천 일대의 정자들이 지어져 그 이후로 활발하게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1828년(순조 28)에 그린 「동궐도(東闕圖)」에서 농산정은 남쪽이 취병(翠屛)으로 둘러싸여 있다. 농산정은 산울타리로 둘러싸여 독립된 외부 공간을 분명히 확보하고 있어 주변의 정자들과 달리 왕이 일정 기간 머물 수 있는 별당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동궐도형(東闕圖形)」에 취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순종대 무렵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옛 분위기를 상실한 상태이다.

형태

두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로, 행랑채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2칸은 대청, 2칸은 온돌방, 1칸은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이곳에서 재숙하고, 다음 날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기신제를 지냈다.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부터 8일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惠慶宮)과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회갑을 기념하여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화성(華城)에 행차를 다녀왔다. 정조는 화성으로 떠나기 며칠 전인 2월 25일에 궁 안에서 자궁(慈宮) 혜경궁의 가마 메는 연습을 몇 차례 실시했는데, 이 예행연습이 끝난 뒤 연습에 참가한 신하들을 농산정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순조는 농산정에 나아가 입직한 음관의 응제를 행했으며(『순조실록』 11년 윤3월 14일), 이해 8월 19일에는 춘당대(春塘臺)에서 내금위 시사(試射)를 한 후 농산정에 나아가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의 응강을 행했다(『순조실록』 11년 8월 19일). 순조의 아들 익종도 농산정을 주제로 시를 많이 지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 한국전통조경학회, 『동양조경문화사』, 대가, 2011.
  •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2006.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