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하(盧亨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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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 12)∼1654년(효종 5) = 35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지평(持平)이다. 자(字)는 장경(長卿)이고, 별호는 팔미군자(八美君子: 팔방미인)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남원(南原)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노철(盧)이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사간원 사간(司諫)최상중(崔尙重)의 딸이다. 폄재(砭齋) 최온(崔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46년(인조 24)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1648년(인조 26)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문원 정자(丁字)에 보임되었다.

효종 시대 활동

1651년(효종 2)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어,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임하였고,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어,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그해 여름에 어머니의 병환으로 말미를 얻어서 고향 남원으로 돌아왔는데, 임금이 특별히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1652년(효종 3) 다시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는데,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오랫동안 참여하였다고 하여, 말 1필을 하사받았다.

1653년(효종 4)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임금이 『삼강행실(三綱行實)』 1부(部)를 하사하였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남원으로 돌아왔다.

1654년(효종 5)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나, 지병(持病)이 심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27일에 병으로 남원의 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35세였다. 전라도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부음(訃音)을 보고하자, 효종이 슬퍼하기를, “노형하의 사람됨을 내가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는데, 지금 그 부음을 들으니,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하였다.[행장]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영민하고 기질이 온화하며, 학문이 높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특히 시(詩)를 잘 지었다. 27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친구들이 노형하를 ‘팔미군자(八美君子)’라고 불렀는데, 학식(學識)⋅문장(文章)⋅용모(容貌)⋅언사(言辭)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필법(筆法)이 뛰어나고, 술버릇[酒德]이 좋고,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었기 때문이다. 노영하가 35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조정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탄식하였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친척처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였다.[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남원부(南原府) 남쪽 주촌(朱村)의 언덕에 있는데, 동강(東岡) 최시옹(崔是翁)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동강유고(東岡遺稿)』 권7]

부인 함안윤씨(咸安尹氏)는 처사(處士) 윤영(尹穎)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외아들 노총(盧總)은 어린아이 때 불행하게 요절하였고, 양자 노식(盧湜)은 형의 아들이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당촌집(塘村集)』
  • 『도암집(陶菴集)』
  • 『동강유고(東岡遺稿)』
  • 『문곡집(文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정관재집(靜觀齋集)』
  • 『지호집(芝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