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명(盧峻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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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52년(효종 3) = 57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장령(掌令)⋅안변부사(安邊府使)이다. 자(字)는 정이(正而)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상주(尙州)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노도형(盧道亨)이고,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좌찬성(左贊成)최황(崔滉)의 딸이다. 영의정노수신(盧守愼)의 증손자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사마방목>] 음보(蔭補)로 직장(直長) 등을 지냈다.

1634년(인조 12)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문과방목>]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청나라 군사와 싸웠다. 그때 남한산성 안에서 청나라와 화해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의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의 척화파(斥和派)가 싸울 때 노준명⋅유백증 등 청류 유학자들은 척화파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하고, 양국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1637년(인조 15)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유백증(兪伯曾) 등이 주화파 정승김류(金瑬)⋅윤방(尹昉) 등의 실정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파직당하자, 정언노준명이 상소하여 유백증 등을 변호하여 구원하려다고 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45년(인조 23) 함경도 홍원목사(洪原牧使)로 나갔는데, 1646년(인조 24) 윤방(尹昉)의 아들 윤이지(尹履之)가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자, 목사노준명은 그 감사 아래에 있기 싫어서 사직하였다. 그 뒤에 삼사(三司)와 세자시강원 등의 청요직(淸要職)에 의망(擬望: 후보자로 추천됨)되었으나, 정권을 잡은 주화파에 의하여 모두 저지당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 3) 죽었는데, 향년이 57세였다.

부인과 후손

첫째부인 이씨(李氏)는 이호신(李好愼)의 딸이고, 둘째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영립(李榮立)의 딸이다.[<방목>] 장남 노사성(盧思聖)은 찰방(察訪)을 지냈고, 차남 노사현(盧思賢)은 참봉(參奉)을 지냈다.[족보]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대산집(大山集)』
  • 『동주집(東州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곡집(明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서집(沙西集)』
  • 『설봉유고(雪峯遺稿)』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소재집(穌齋集)』
  •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복집(愚伏集)』
  • 『월간집(月澗集)』
  •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 『인재유고(麟齋遺稿)』
  • 『현주집(玄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