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형(盧自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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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4년(태종 14)∼1490년(성종 21) = 77세.] 조선 전기 문종~성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노의(盧義)이다.

문종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문과방목>]

성종 시대 활동

1477년(성종 8) 성균관에 들어가서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였다.

1482년(성종 13) 유교의 경전만을 전공하는 전경문신(專經文臣) 45인을 선발하는 데에 사성노자형도 뽑혔다. 이때 그를 선발한 사람은 판서(判書)서거정(徐居正)이었다. 이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영전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인재를 양성하였다.

1483년(성종 14) 나이가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성균관 대사성에서 치사(致仕)하기를 원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484년(성종 15) 대사성노자형이 승정원을 통하여 사직하기를 다시 간청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488년(성종 19) 다리 병으로 걷지를 못하여 마침내 대사성에서 물어났는데, 성종이 한직인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에 임명하였다. 노자영은 늙어서 왼쪽 다리를 절게 되어 걷는 데 큰 불편을 겪었다.

1490년(성종 21) 7월 29일 노병으로 서울 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77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곧고 바르고 지조도 굳고 높았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기록된 노자형의 졸기(卒記)를 보면, “노자형은 성품이 경개(耿介)하고 학술(學術)이 순정(醇正)하였다. 일찍이 노자형이 작은 병으로써 벼슬을 사양하고 영달(榮達)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종이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성균관 사예에 임명하여 후진을 가르치게 하니, 후진 양성에 이룩한 공이 많았다. 성균관의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는데, 노자형이 나이가 많다고 하여 다시 사직하기를 원하여 여러 번 글을 올렸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병이 있어서 다리를 절게 되자, 임금이 한직(閑職)에 임명하여 수양하게 하였다. 노자형이 벼슬을 그만두고 전리(田里)로 돌아갈 때 성균관 유생들과 벼슬하는 관리 가운데 일찍이 그에게 수업(受業)을 받은 자들이 동쪽 교외(郊外)에 나와서 전송하였는데, 관개(冠蓋: 관리가 탄 수레)가 가득하게 넘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 뒤에 1년이 지나서 노자영은 돌아갔다.” 하였다.[『성종실록』 21년 7월 29일 3번째기사]

노자영은 성리학에 정통하고 강론(講論)을 조리 있게 잘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성종 때 노자영은 평생토록 성균관에서 후진 양성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노자영이 죽은 뒤에도 성종은 인재 양성에 힘쓴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주읍지(光州邑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