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유녕(盧維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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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책봉에 관한 조칙을 반포하기 위해서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의 환관.

개설

1634년에 명나라 사례감(司禮監)의 태감(太監)으로 조선에 도착하였다. 조선에 머물면서 탐욕스럽게 재물을 밝히고 포악스러운 짓을 자행하였다.

활동 사항

1634년에 노유녕은 소현세자의 책봉에 관한 조칙을 선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조선 내부에서는 그가 조선행을 자원하였으며, 청렴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 정부는 그를 영접하기 위해서 김신국(金藎國)을 원접사로, 홍서봉(洪瑞鳳)을 관반(館伴)으로 삼았으며(『인조실록』 12년 3월 20일), 인조는 6월 20일 새벽에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로써 칙사를 맞이하였다(『인조실록』 12년 6월 20일).

노유녕은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참배를 하면서 함께하였던 유생들에게 백금 50냥을 내놓기도 하였지만, 탐욕과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심하였다. 지나는 길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그릇이나 방에 있는 여러 물건을 무단으로 거두어들여서 타고 온 배로 보내어서 싣도록 하였는데 약 은화 100,000냥을 뜯어갔다고 한다. 한편 명나라 칙사들이 조선을 다녀갈 때, 황해도 평산군의 옥류천 암벽에 글을 새기는 일이 있었는데, 노유녕도 그곳에 ‘현주(懸珠)’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노유녕의 탐욕스러운 행동은 명나라에 전해져서, 명 황제로부터 탄핵을 받았다(『인조실록』 12년 10월 17일). 이듬해인 1635년에 명 황제는 사은사로 도착한 송석경(宋錫慶)에게 노유녕이 전별금으로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은 6,000냥을 돌려주었다.

한편 노유녕이 서울에 머물 때, 후금의 마부대(馬夫臺) 일행이 인삼 값을 받기 위하여 서울로 출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 정부는 마부대 일행이 서울로 향하는 것을 막고 서둘러 인삼 값을 주어서 귀환시키기도 하였다. 노유녕의 사행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후금(청)이 부상하는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숭정 황제의 태자의 행방을 찾는 일이 있었다. 한 중이 절에서 17세 된 아이를 태자라고 하여 데리고 왔는데, 태자의 누이와 2명의 환관이 태자가 맞다 말한 반면에 노유녕은 태자라고 지목된 인물에게 황제의 이름을 써 보라고 말하면서 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인조실록』 23년 3월 17일).

참고문헌

  • 『연도기행(燕途紀行)』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한명기, 『병자호란』 1, 푸른역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