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문(路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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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노문 |
한글표제 | 노문 |
한자표제 | 路文 |
상위어 | 관문서(官文書) |
관련어 | 선문(先文), 초료(草料) |
분야 | 정치/행정/문서·행정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박성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노문(路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7년 10월 29일 |
조선후기 관원의 공무 출장 및 휴가 등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발급한 문서.
개설
노문(路文)의 발급 제도는 영조대에 홍봉한의 건의로 제정되었다. 행선지, 수행 인원, 이용할 마필 등에 대한 사항을 기재하였다. 왕복에 대비하여 2건을 발급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선혜청에서 수합하여 결산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도 관원들의 공무나 휴가를 위한 여정에는 그에 필요한 수행 인원이나 말 등 이동 편의를 제공하였다. 해당 여정의 경로에 있는 역이나 관아 등에 미리 문서를 내려보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임의로 필요 인원을 늘리는 등의 폐단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1762년(영조 38)에 홍봉한이 중국의 패문(牌文) 제도를 모방하여 노문 제도를 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노문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정식(定式)이 마련되었다. 노문에는 해당 관원의 품계와 여정에 따른 수행 인원 및 마필 등의 수효가 규정에 따라 기입되었다.
노문 제도가 처음으로 마련된 영조대의 기사는 『승정원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조대에 “사성(使星)이 나가게 될 적에는 이미 노문의 정식이 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정조실록』 7년 10월 29일).
현재까지 남아있는 노문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고문서와 달리 목판에 새겨 인출한 서식지에 필요 사항만 붓으로 기입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는 병조에서 문서 발급을 관장하였고, 지방의 경우 관찰사가 발급한 사례가 확인되었다.
노문은 기본적으로 한 번에 2건을 발급하여 출발할 때와 복귀할 때에 각각 사용하였다. 사용된 노문은 최종적으로는 선혜청에서 모아 정산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
노문 제도가 제정되기 전에도 선문(先文) 등으로 지칭된 유사한 성격의 문서가 있었으나 운용 과정에서 발생한 폐단으로 인해 중국의 패문 제도를 모방한 노문이 제정되었다. 이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전회통(大典會通)』
- 『노문식례(路文式例)』
- 최승희, 증보판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 송철호, 「조선 후기 路文에 관한 연구」, 『고문서연구』 4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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