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문한(盧文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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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0년(선조 33)∼1665년(현종 6) = 66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정랑(正郎)⋅능주목사(綾州牧使)이다. 자(字)는 사장(士章)이고, 호(號)는 죽정(竹汀)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노극리(盧克履)이고, 사헌부 지평(持平)노계원(盧繼元)의 조카이다. 고석(孤石) 목장흠(睦長欽)의 문인인데, 충청도 청주⋅청원 지역을 대표하는 남인(南人) 세력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사마방목>]

1635년(인조 13)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문과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었다.

1645년(인조 23) 성균관 학록(學錄)으로 승진하였고, 공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1646년(인조 24)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지평이 되어[『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4년 3월 18일]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지방의 수령관으로 나가서, 전라도 능주목사(綾州牧使)⋅김제군수(金堤郡守)와 평안도 안주판관(安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현종 시대 활동

1665년(현종 6) 죽었는데, 향년이 66세였다.[족보]

성품과 일화

성품이 대쪽같이 곧고 절개가 있었다.

노문한의 집안은 충청도 청주⋅청원 지역을 대표하는 남인(南人) 세력이었다. 노문한은 첫째부인 조씨(趙氏)가 돌아가자, 둘째부인으로 은진송씨(恩津宋氏)를 맞아들였는데, 장인 송희원(宋希遠)은 충청도 회덕(懷德)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에 노문한이 살아 있을 때에는 충청도의 대표적인 남인 집안과 서인 집안이 나란히 중앙 정계에 참여하여 화목하게 지냈으나, 숙종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과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들이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당하였다. 그 뒤에 영조가 즉위하여, 서인의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충청도 청주⋅청원 지역의 남인 세력을 대표하는 이인좌(李麟佐)가 3남 지방의 소론 세력과 손을 잡고, 청주⋅청원 지역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충청도 청주⋅청원 지역의 남인 세력은 몰락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에 있다.

첫째부인 조씨(趙氏)는 조식(趙湜)의 딸이고, 둘째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찰방(察訪)송희원(宋希遠)의 딸이다.[<방목>] 장남은 노상(盧庠)이고, 차남 노서(盧序)는 진사(進士)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동춘당집(同春堂集)』
  • 『상촌고(象村稿)』
  • 『상촌집(象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