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鷺梁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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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 수원, 김포로 행차할 때 도착하던 나루터이자 주정소(晝停所).

개설

노량진(鷺梁津)은 숙종대인 1703년(숙종 29)에 조성되었다. 숙종대에는 금위영(禁衛營) 소속이었으며, 1790년(정조 14)에 장용영(壯勇營) 주교소(舟橋所)에 이속되었다가 순조 초반에 다시 금위영으로 환속(還屬)되었다. 노량진이 한강변에 자리한 것은 정치적, 군사적, 지리적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왕이 경기 남부로 행행할 때 한강을 건너 노량진을 지나면 단종에게 충절을 드러내며 죽임을 당한 성삼문 등의 사당이 있어서, 왕의 입장에서 왕권에 충성을 다한 이들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며 당대 관료와 민인들에게 충성을 유도할 수 있는 장소였다. 군사적으로는 노량진 주변의 넓은 한강변 백사장은 1만 명 이상의 대부대가 모여 동시에 군사 훈련 및 사열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지리적으로는 도성을 나와 용산에 이르러 한강을 건너면 바로 도달하였으며, 노량진을 통해 수원·부평·인천·안산·광주 등 경기 남부의 주요 도시로 향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노량진의 지휘는 별장(別將)이 담당했으며, 그 휘하에 초관(哨官) 2명, 기패관(旗牌官) 1명, 명원(名員) 8명, 취고수(吹鼓手) 30명, 기수(旗手) 8명, 취고수(吹鼓手) 10명이 있었다. 아병(牙兵)은 124명이 보름마다 10명씩 돌아가며 당직하였다. 진선(鎭船)이 15척이었으며, 급수선(汲水船) 2척, 향축배행선(香祝陪行船) 1척이 있었다.

두 차례의 호란 이후 노량진 등을 비롯한 한강의 주요 나루터는 오군영에서 관리하였다. 당시 경강(京江)은 한강(漢江)·용산강(龍山江)·서강(西江)의 세 개로 나뉘었는데, 한남동에서 노량진 일대까지를 한강, 마포 일대를 용산강, 양화진 일대를 서강이라 하였다. 1710년(숙종 36) 한강의 나루터 중에서 삼전도(三田渡)는 총융청, 한강은 훈련도감, 양화도(楊花渡)는 어영청, 송파진(松波津)은 수어청, 노량진은 금위영에서 담당하였다. 군영에서는 해당 나루터에 별장을 선발해서 배속시켰다(『숙종실록』 36년 10월 4일). 1746년(영조 22)에 노량진별장은 동작진(銅雀津)도 겸해서 관리하였다. 당시 노량진에는 배가 15척이 있었는데,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들이 동작진에서 도강하려 할 때 사선(私船)이 모두 부패하여 못 쓰게 되어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송하였다.

노량진은 왕의 원거리 행행 행차가 거치는 곳이면서도 백사장이 넓어서 시위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호궤나 임시 과거, 군사 훈련 등의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1655년(효종 6)에 효종이 장릉에 능행을 마치고 환궁할 때는 어영도제조(御營都提調)이시백(李時白)과 총융사(摠戎使)구인기(具仁墍)가 어영군 및 양주(楊州) 군병을 거느리고 노량진 백사장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대가를 수행했던 군대와 합류하여 한 개의 진을 편성했는데 13,000여 명이었다. 효종은 이시백과 훈련대장이완 등에게 군병의 훈련을 지시했는데 도성의 남녀들이 몰려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효종실록』 6년 9월 29일). 1734년(영조 10)에도 영조가 장릉의 능행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노량진에서 열무(閱武)하였다(『영조실록』 10년 9월 16일). 이후 고종대에도 노량진에 행행하여 수조(水操)를 행하고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서 경숙(經宿)하였다(『고종실록』 4년 9월 9일).

노량진을 통해 한강을 건너는 것이 지리적으로 수월했던 것은 영조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영조가 1745년(영조 21) 2월에 강화도의 만녕전(萬寧殿)에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게 하였는데, 예조의 절목(節目)에는 어진을 받들고 갈 때의 진로(津路)를 양화도(楊花渡)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양화진은 선창(船艙)을 쌓을 형세가 아니었다. 반면 노량진은 주변의 진(津) 중에서 제일 편리하고 장릉(章陵)의 연로(輦路)라는 이유로 선정되었다. 양화도 대신에 노량진을 이용하면 20리를 돌아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당일 김포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했다[영조실록』 21년 2월 20일 2번째기사].

변천

노량진은 정조대 원행(園幸)의 거둥길이라서 더욱 중요시되었다. 특히 정조의 친위부대라고 하는 장용영이 설치되면서 지위가 높아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장용영에 이속되었다. 당시 노량진에는 좌우 아병 121명, 표하군 23명, 향취수 30명이 배속되었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정조는 화성에 현륭원을 조성한 후부터 매년 봄과 가을에 원행하면서 한강을 건널 때는 반드시 노량진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런 까닭에 장용영에서는 노량진의 별장을 직접 임명하였고, 별아병(別牙兵) 1초와 배봉진의 아병 2초를 합해서 3초의 제도로 만들었다. 그리고 노량진별장의 깃발은 별아병장(別牙兵將)이라고 부르도록 했다[『『정조실록』 17년 1월 25일 3번째기사].

정조대에 노량진의 기능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용양봉저정을 설치한 이후부터이다. 노량진에 용양봉저정을 설치하면서 노량진에는 일시적인 주정소가 아닌 행궁 규모의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주교(舟橋)를 설치하면서 노량진의 별장이 석축을 감독하고 목재를 지키게 하였다(『정조실록』 14년 12월 24일).

1793년(정조 17)에는 장용영 제조정민시(鄭民始)의 주장에 따라 양주(楊州)와 과천(果川)에 소재하는 광주(廣州) 소관의 군량미 500섬을 노량진에 소속시켜 환곡의 밑천으로 삼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7년 9월 2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陵幸의 意義」, 『한국학보』88, 일지사, 1997.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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