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지전(露梁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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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과 명의 진린(陳璘)이 이끈 조명연합군의 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둔 해전.

개설

풍신수길(豊臣秀吉) 사망 후 철수하려는 일본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이 노량 앞바다에서 벌인 전투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다.

역사적 배경

일본의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계략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이순신에서 원균(元均)으로 교체되었다.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이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면서 조선 수군은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8월 3일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었고, 9월 16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 수군을 재건하였다.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했던 이순신은 1598년(선조 31) 2월 17일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겼다(『선조실록』 31년 3월 18일). 이순신이 진영을 옮긴 이유는 순천에 주둔 중인 소서행장(小西行長)에 대처하고 해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둔전(屯田)을 경작게 하고 염전(鹽田)에서 생산된 소금을 판매하여 군량 확보에 노력하는 등 전비를 강화해 나갔다.

울산성 전투에서 패한 후 명의 경리(經理)양호(楊鎬)는 조선의 산세가 지역마다 다르며 지형이 험해 군사를 한곳에 모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만큼 각 지역의 장수가 전투를 책임지도록 하여야 한다며 사로병진작전(四露竝進作戰)을 제시했다. 그 결과 동로는 마귀(麻貴), 중로는 동일원(董一元), 서로는 유정(劉綎)이 담당키로 했다. 이와 함께 진린(陳璘)은 수로를 맡기로 하였다. 사로병진작전에 따라 7월 16일 진린이 거느린 명의 수군이 고금도에 합류하였다.

발단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이 사망한 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퇴각을 위해 소서행장은 명제독유정(劉綎)과 협의하여 예교성(曳橋城)을 명군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철군을 허락받았다. 유정이 예교성 공격을 중단하였지만, 이순신과 진린은 예교성 공략작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수군만으로 예교성을 함락시킬 수 없자 퇴로를 차단하는 봉쇄작전을 펼쳤다.

11월 13일 소서행장은 선발대 10여 척을 부산으로 출발시켰지만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군에 격퇴당해 예교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소서행장은 진린과 이순신에게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순신은 거절했다. 하지만 진린의 묵인하에 남해 쪽에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의 구원군이 올 경우 앞뒤에서 협공당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해 노량(露梁)으로 함대를 이동하였다. 한편 진린 역시 소서행장과의 협상이 결렬된 상태였던 만큼 이순신을 따라 노량으로 옮겨 왔다.

경과

1598년 11월 18일 소서행장의 구원 요청에 응해 도진의홍(島津義弘)과 종의지(宗義智) 등은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노량해협으로 이동했다. 이에 맞선 조명연합군의 전력은 진린이 거느린 명의 수군 200여 척에 이순신이 거느린 전선 80~100여 척 정도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노량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진린은 곤양(昆陽: 현 경상남도 사천)의 죽도(竹島)에서, 이순신이 거느린 조선군은 관음포(觀音浦) 위쪽에서 일본군을 기다렸다. 11월 19일 새벽 조명연합군은 노량해협으로 이동하다가 일본군 함대와 마주쳤다. 조명연합군이 화공을 펼치자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관음포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9일 아침 날이 밝자 일본군은 관음포에 갇힌 사실을 알고 탈출을 위해 해전에 임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진린의 배에 일본군이 올라와 칼을 휘두르자 진린의 아들 구경(九經)이 몸을 던져 막았고, 진린과 이순신이 탄 배가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으며, 명의 장수 등자룡(鄧子龍)·진천(陳蚕)·도명재(陶明宰) 등이 전사할 정도로 전투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조선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이영남(李英男)·낙안군수(樂安郡守)방덕룡(方德龍)·흥양현감(興陽縣監)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특히 이순신 역시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전사하였다[『『선조실록』31년 11월 27일 5번째기사].

전투는 19일 정오 무렵 조명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조명연합군은 일본 전선 200여 척을 불태웠고, 100여 척을 나포했으며, 500여 명을 사살했다. 그 외 물에 빠져 죽은 일본군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예교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지만, 소서행장은 해전이 치러지는 동안 남해도 남단을 우회하여 철수하였다. 부산에 머물던 일본군은 소서행장이 합류하자 24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7년에 걸쳐 조선·명·일본 등이 치열한 전투를 펼쳤던 전쟁은 끝이 났다.

노량해전의 승리로 명과 일본은 조선의 수군이 강함을 다시 한 번 인정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일본과의 전쟁이 패배한 전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이민웅, 「조·명 연합함대의 형성과 노량해전 경과」,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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