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광두(盧光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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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72년(영조 48)∼1859년(철종 10) = 88세.] 조선 후기 순조~철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청지(淸之)이고, 호(號)는 감모재(感慕齎)⋅감모당(感慕堂)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함양(咸陽) 개평촌(介坪村)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노석규(盧錫奎)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래오(朴來吾)의 딸이다. 승지신성진(愼性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시대에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종2품 대신의 반열에 오르고 최장수한 노인의 한 사람이다.

순조 시대 활동

1814년(순조 14)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819년(순조 19)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

1820년(순조 20) 사직서 령(社稷署令)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때 함양군(咸陽郡)과 안의현(安義縣) 등의 조적(糶糴)의 폐단을 진달(陳達)하고 그 개혁할 방도를 건의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이때부터 대간(臺諫)의 청요직(淸要職)에 자주 임명되었다.

1823년(순조 23) 이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1826년(순조 26) 경상도 경산자인현감(慈仁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827년(순조 27) 경상도 도사(都事)가 되어, 감영(監營)의 업무도 아울러 관리하였다.

1830년(순조 30)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곧 체임(遞任)되었다.

1834년(순조 34) 순조가 45세의 나이로 돌아가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곡림(哭臨)하였다.

헌종 시대 활동

1834년(헌종 즉위) 11월에 나이 겨우 8세의 헌종이 즉위하자, 1836년(헌종 2)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임금의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이륜(彛倫)과 도덕으로 임금을 보도(輔導)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전(經傳) 중에서 중요한 어록(語錄)만을 뽑아서 책을 만들어 바치고, 또 『소학(小學)』의 어귀(語句)도 조목별로 주해(注解)하여 아울러 바치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고 하여 특별히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경연(經筵)에서 어린 헌종에게 아뢰기를, “효제(孝悌)의 도리는 『소학(小學)』 1부에도 실려 있습니다.”하고, 그 문의(文義)를 부연하여 설명하였는데, 그 설명이 명백하고 그 뜻이 절실하였으므로, 어린 헌종이 귀를 기울여 경청(傾聽)하였다.

1840년(헌종 6)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지방 수령관을 역임하였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불과 23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하자, 마치 부모가 돌아간 것처럼 애통(哀痛)해 하였다.

철종 시대 활동

1851년(철종 2) 나이가 80세가 되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말미를 받아서 고향 함안(咸安) 개평촌(介坪村)으로 돌아와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며, 왕정(王政)에서 먼저 시행해야 할 시무(時務) 10여 가지를 아울러 진달하니, 철종이 가납(嘉納)하고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말년에 동생 노광리(盧光履)와 함께 아버지 노석규(盧錫奎)의 글 중에서 중요한 요지를 뽑아서 「가학십도(家學十圖)」를 만들고, 집안의 자녀와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또 집안의 입향조(入鄕祖)인 송재(松齋) 노숙동(盧叔同)의 묘소 아래에 ‘신의재(申義齋)’라는 재실(齋室)을 짓고, 만년에 이곳에서 거처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매년 동지날 고을의 수재(秀才)들을 재실에 초치하여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고 격의 없이 서로 토론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1859년(철종 10) 11월 17일 노병으로 고향 개평촌(介坪村)의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88세였다.

저서로는 『감모재집(感慕齋集)』 2권 1책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질박하고 행실이 순실(淳實)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효성을 다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중년의 나이에 겨우 벼슬을 하게 되자, 먼저 사당(祠堂)부터 세우고, 새벽에 반드시 사당에 배알(拜謁)하였는데, 늙어서 몸이 쇠약한 뒤에도 새벽에 사당에 배알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제철 음식을 먼저 조상의 사당에 올리지 않고 먹은 적이 없었으며, 자기 생신(生辰)에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경(詩經)』의 ‘육아시(蓼莪詩)’를 병풍에 써서 두고, 매일 이것을 읽으며 소리 내지 않고 조용하게 오열(嗚咽)하였는데, 육아시(蓼莪詩)는 부모의 봉양을 뜻대로 하지 못한 효자의 슬픔을 읊은 시이다.

일찍이 효성(孝誠)하는 마음으로 충성(忠誠)을 다하겠다고 인금에게 맹세하였는데, 벼슬을 하게 되면서부터 한 밤중에 북쪽을 향하여 반드시 네 번 절하였다. 늙어서 병이 들어서 근력(筋力)이 없어서 예(禮)를 행하지 못하게 되자, 방안에서 부복(俯伏)하며 시종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냈는데, 효성과 충성은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버지의 유고(遺稿) 중에서 좋은 말씀만을 골라서 누구나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서 「가학십도」를 만들어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후진을 양성할 때 반드시 효제(孝悌)를 가르쳤다. 주자(朱子)의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선현(先賢)의 유집(遺集)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8, 90대에 이르렀으나 살결이 부드럽기가 마치 어린아이[童子] 살결과 같았는데, 이것으로도 그의 평소 소양(素養)을 징험할 수 있다.[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북쪽 부롱(釜壠)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고산집(鼓山集)』 권12]

첫째부인 분성허씨(盆城許氏)는 허점(許漸)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둘째부인 진양하씨(晉陽河氏)는 하한제(河漢濟)의 딸인데, 자녀는 없었다. 셋째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송득상(宋得祥)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노기수(盧箕壽)이고, 장녀는 김기상(金麒商)에게, 차녀는 강상기(姜相基)에게, 삼녀는 하종일(河鐘一)에게, 사녀는 정재헌(鄭在憲)에게 각각 시집갔다.[묘갈명]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감모재집(感慕齋集)』
  • 『고산집(鼓山集)』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