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복(盧景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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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정랑(正郎)⋅중추부 동지사(同知事)이다. 자(字)는 수중(綏仲)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노팽수(盧彭壽)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9년(선조 12)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1594년(선조 27) 경상도 군위의흥현감(義興縣監)이 되었는데, 왜군들과 싸우다가 격분한 현감노경복이 투항한 왜인(倭人) 2명을 임의대로 살해하였다고 하여 처벌을 받았다.

1600년(선조 33) 경상도영천군수(榮川郡守: 지금의 영주)가 되어서, 중국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백성들에게 강제로 거두어 공급하였는데,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명나라 군사를 지대(支待)한다고 핑계하면서 백성들을 날로 극심하게 침탈하자, 고을 백성들이 잇따라 유망(流亡)하고 있습니다. 파직시키소서.”하니, 선조가 파직시켰다. 그러나 7년 동안 계속된 왜란이 끝난 다음에, 1601년(선조 34) 형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어, 형률에 따라 어려운 소송을 잘 처리하였다.

성품과 일화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사평(史評)에서 노경복을 논평하기를, “위인이 용렬한데다가 성품도 탐학스러웠다.” 하였다.[『선조실록』 33년 3월 16일 1번째기사] 사관이 반대파를 공격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1594년(선조 27) 10월에 경상도 방어사(防禦使)김응서(金應瑞)가 치계(馳啟)하기를, “투항한 왜병 3명이 의성(義城)에서 의훙(義興)을 지나갈 때에 의흥현감노경복(盧景福)이 제멋대로 살해할 것을 꾀하여, 두 명은 죽고 한 명은 도망쳤는데, 필시 그들의 본진(本陣)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현감노경복을 각별히 엄중하게 다스려, 항복한 왜병들의 의구심을 풀어주소서.” 하였다. 이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노경복은 조정에 품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장(主將)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제맘대로 살육을 자행하였으니,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선조가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5일 3번째기사] 당시 <임진왜란>이 7년 동안 계속되자, 왜군들 가운데 투항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갔는데, 의흥현감노경복(盧景福)이 제멋대로 투항한 왜군을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경상도 북부 지방에는 왜군과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안동 지방이 왜군들에게 점령당하여 지방 수령관이 모두 도망쳐 달아나는 상황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신령(新寧)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서 안동(安東)으로 향하자, 안동부사(安東府使)정희적(鄭熙績)은 도망쳐 달아났다. 또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이 의흥으로 옮겨가서 의흥성을 함락시키니, 의흥현감(義興縣監)노경복은 도망쳐 달아났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변사에서 의흥현감노경복이 항복한 왜병을 죽였다고 하여, 처벌할 수도 없었을 것 같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난중잡록(亂中雜錄)』
  • 『현곡집(玄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