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원경(內藏院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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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내장원(內藏院)의 최고 책임자.

개설

이용익(李容翊)은 1899년 2월에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內藏司)장(長)에 임명되었고, 1904년까지 재임하면서 황실 재정을 맡아 다스렸다. 이용익 이후 내장원 경에 임명된 인물의 임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장원 경에 임명된 인물은 1907년 11월에 임명된 최석민(崔錫敏)이었고, 그는 1910년까지 근무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은 1895년에 내장원 경(卿)·보물사(寶物司) 장·장원사(莊園司) 장 각 1명과 주사 9명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같은 해 명칭을 내장사로 바꾸고, 관원도 장 1명, 주사 5명으로 축소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1899년 8월 내장사를 다시 내장원으로 개편하면서 기구를 확대하였다. 내장원은 종래 관장하던 궁장토(宮庄土)와 역둔토(驛屯土)에 더해, 홍삼(紅蔘)·광산(鑛山)· 종목(種牧)까지 관장하였다.

내장원 경은 내장원의 최고 책임자로, 1899년 내장사가 내장원으로 개편되면서, 내장사 장에서 내장원 경으로 장관의 명칭이 바뀌었다.

조직 및 역할

내장원 경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임명된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용익은 1899년 2월에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 장에 임명되었고, 내장사가 1899년 8월에 내장원으로 개편된 뒤에는 내장원 경에 임명되었다. 1904년까지 재임하면서 황실 재정을 맡아 궁내부 소속의 인삼밭[蔘圃]과 광산을 엄중하게 관리하여 왕실 수입을 늘렸다.

이용익은 수시로 탁지부 협판, 혹은 대신을 겸직하면서 정부 재정에도 깊숙이 간여하였다. 그가 군부 원수, 경부 경위원 등의 관직을 맡은 데에는 군사와 경찰 비용이 당시 정부 세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종이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황제 직속으로 설치한 서북철도국, 양지아문, 지계아문, 중앙은행 등에 총재 혹은 부총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내장원 경이용익은 본래 광무감리(礦務監理) 출신으로 광산 전문가였다. 그는 궁내부에 광학국을 설치하는 한편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광산을 조사하게 하고 최신 기계를 구입하는 등 황실의 광산 경영에 앞장섰다.

이용익 이후 내장원 경에 임명된 인물의 임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1904년 2월 이성렬(李聖烈), 1904년 5월 박제홍(朴齊弘), 1904년 6월 민병성(閔丙星), 1904년 7월 이관응(李觀應), 1904년 8월 민치준(閔致駿), 1904년 9월 엄석우(嚴錫祐), 1904년 10월 이명직(李明稙), 1904년 11월 김윤환, 1904년 12월 이명철(李命喆), 1905년 2월 윤최영(尹最榮), 1905년 3월 신재영(申載永) 등이 내장원 경으로 임명되었다. 마지막으로 내장원 경에 임명된 인물은 1907년 11월에 임명된 최석민이었고, 그는 1910년까지 근무했다.

변천

내장원 경은 내장원의 제도 변천과 궤를 같이 하였다. 1905년 3월에 ‘궁내부 관제’가 전면적으로 개정되면서 내장원이 다시 내장사로 개편되었다. 내장사는 정부에서 지급하는 황실 경비의 회계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1908년 8월 궁내부 산하의 제실 재산 정리국은 궁내부 소속 황실 재산을 모두 정리함에 따라 내장원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이윤상, 「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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