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천현(狼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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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낭천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낭천 지방을 통치하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초기에 낭천은 삭방도(朔方道)에 편제되었고 춘주(春州)의 속현이었다. 12세기 초반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조선초기에 현감(縣監)과 훈도(訓導)가 파견되는 주현(主縣)이 되었으며, 군익도(軍翼道) 체제에서 원주도(原州道)에 귀속되었고, 진관(鎭管) 체제에서 춘천진(春川鎭)에 귀속되었다. 17세기에 일시적으로 김화현(金化縣)에 합병되었다가 다시 낭천현으로 복구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생천(狌川) 또는 야시매(也尸買)라 하였다. 신라에서 낭천(狼川)으로 고쳤고, 통일신라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군(郡)으로 삼았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10도제에서 삭방도에 편제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춘주의 속현이 되었고, 1106년(고려 예종 1)에 감무가 설치되었으며, 양구를 함께 다스렸다.

조선 1393년(태조 2)에 감무가 파견되었고, 1413년(태종 13)에 현감과 훈도가 파견되어 주현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 체제에 따라 원주도(原州道)를 설치하고, 원주는 중익(中翼)으로, 낭천은 우익(右翼)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 체제에서 낭천은 춘천진에 귀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644년(인조 22)에 낭천현이 폐지되어 김화현에 합병되었다가 1653년(효종 4)에 낭천현으로 복구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현감과 훈도 각 1인을 배치하였다. 현감은 6품으로 음관(蔭官)직이었다. 현감 예하에는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2인을 두었다. 6방(六房) 관속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증감이 있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관군관(官軍官) 7인, 아전(衙前) 20인, 지인(知印) 10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 6명, 관노(官奴) 12명, 관비(官婢) 8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객사(客舍), 아사(衙舍), 향청(鄕廳), 훈련청(訓練廳), 관군관청(官軍官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관노청(官奴廳) 등에 배속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춘천부와 강릉부로 분할되었다. 아울러 부의 하부조직으로 군현제를 폐지하고 군으로 일원화하였다. 이때 낭천군은 춘천부에 예속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강릉부와 춘천부를 통합하여 강원도로 하였고, 이때 낭천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1902년(고종 39)에 낭천군을 화천군으로 개명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