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합출(納哈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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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공신 무칼리의 후예로 원말~북원 시기 요동 지방의 최고 권력자.

개설

납합출(納哈出)은 몽골어 나가추(Naγaču)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이다. 나가추의 선조는 대대로 요동 지방의 군사 책임자였다. 나가추는 원래 태평로(太平路)의 만호장(萬戶長)이었으나 1255년에 주원장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뒤 홍건군(紅巾軍)과의 전투에 적극 참여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는 원나라 말기에 요양행성(遼陽行省) 평장정사(平章政事)로서 심양(瀋陽) 땅에 근거를 두고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1362년 2월 고려의 반역자 조소생(趙小生)에 이끌려, 동북면(東北面) 쌍성(雙城)을 공격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배하고 달아났다.

1368년 명나라 군대에 밀려 상도로 물러난 원 황제 토곤 테무르는 나가추 등 요동세력에 크게 의지하려고 하였다. 그는 1368년 8월 나가추를 요양행성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였다. 또한 그다음 달에 나가추에게 태위(太尉)의 직함을 더 내려 주었다.

가계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개국공신 무칼리([木華黎], Jalair Muqali) 후예였다.

활동 사항

북원 시기에 나가추는 비교적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대체로 예전과 같이 북원 중앙정부의 지시를 따라 활동을 하였다. 나가추는 그의 직할 영토가 북원과 고려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두 나라를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면서 이권을 챙겼다. 나가추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으며 고려에서는 그에게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 벼슬을 주는 등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나가추는 북원 정권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고려 역시도 북변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나가추 세력에 상당 부분 의지하였다. 그는 북원 정권과 협력하여 1372년 명군의 전초기지인 우가장(牛家庄)을 공격하여 요동의 명 군대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1380년대 중엽에 들어 명나라는 북원과 나가추, 고려의 삼각관계를 차단시키기 위하여 나가추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결국 주원장은 1387년 1월에 군대를 파견하고 다른 한편으로 회유를 위하여 초무(招撫) 사자를 파견하여 양면으로 나가추를 압박하였다. 같은 해 6월에 명 군대가 압박을 더욱 강화하자 나가추는 결국 항복하였다. 나가추의 투항은 북원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나가추는 명나라에 항복한 후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져 운남(雲南) 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차간([察罕], Čaγan)을 심양후(瀋陽侯)로 책봉하였다.

나가추는 고려를 토벌하면서 이성계와 싸운 적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소생(趙小生)이 원나라 심양행성(瀋陽行省) 승상(丞相)납합출을 유인(誘引)하여, 삼살(三撒)·홀면(忽面)의 땅에 쳐들어왔다[『태조실록』 총서 40번째기사].’는 기록이 있다. 이후 나가추는 변방 오랑캐의 조선 침략 사례로 조선초기에 간간히 등장하였다.

참고문헌

  • 『원사(元史)』
  • 『고려사(高麗史)』
  • 동북아역사재단 편, 『명사 외국전 역주(明史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2012.
  • 윤은숙, 「나가추의 활동과 14세기말 동아시아 정세」, 『명청사연구』 제28집, 명청사학회, 2007.
  • 첵메드 체렝도르지,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북원과 고려의 관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