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제(臘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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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납제 |
한글표제 | 납제 |
한자표제 | 臘祭 |
관련어 | 납향(臘享) |
분야 | 왕실/왕실의례/길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납제(臘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9년 12월 10일, 『태종실록』 14년 11월 11일 |
납일에 거행하는 제사.
개설
납제(臘祭)는 납향(臘享)이라고도 부른다. 납제와 납향을 구별하자면, 납제는 납일에 지기(地祇)에게 거행하는 제사인 반면, 납향은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제향이다. 그러나 납제와 납향은 서로 혼용되었고, 납향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특징
고대 주(周)나라에서는 세말(世末)에 한 해의 농사를 도와준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제(蜡祭)와, 선조에게 제사 지내는 납향이 있었다. 진한(秦漢) 이후 납향으로 통칭하였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孟冬)에 선조와 오사(五祀)에게 납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납향은 사냥[獵]으로 잡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초기에는 사냥한 고기를 납향에 바치기도 하였지만(『태종실록』 9년 12월 10일), 이러한 관습은 곧 폐지되었다(『태종실록』 14년 11월 11일).
납일을 정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대개 동지부터 세 번째 오는 술일(戍日)이나 진일(辰日)을 납일로 정하지만, 조선에서는 동지를 지난 후 세 번째로 오는 미일(未日)을 납일로 정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사시제(四時祭)와 납향은 1년의 제사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에는 사시제와 납향을 합쳐 ‘시향(時享)’ 또는 ‘오향(五享)’이라 불렀다. 그리고 송(宋), 명(明), 고려 등에서도 사시제와 납향을 종묘의 대제(大祭)로 간주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사시제와 납향을 오향대제(五享大祭)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종묘에서 납제를 거행할 때에는 선왕과 선후 외에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에게도 함께 제사지냈다. 그 밖에 사직, 경모궁, 영희전 등에서도 납향제를 거행하였다. 육상궁 등 생모(生母)를 위한 궁에서는 정조, 한식, 단오, 추석에 거행하는 사명일(四名日) 절제가 있지만 동지와 납향은 없다. 조선전기에 왕릉에서는 납향제를 거행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 이욱,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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