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의(南孝義)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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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효의 |
한글표제 | 남효의 |
한자표제 | 南孝義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중유(仲柔) |
호 | 지재(志齋), 지소재(志素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본관 | 의령(宜寧) |
주거지 | 서울[京] |
증조부 | 남간(南簡); 문과 급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
조부 | 남준(南俊); 사헌부 감찰(監察) |
부 | 남회(南恢); 진사(進士), 부호군(副護軍) |
모_외조 | 박씨(朴氏); 박소정(朴蘇貞)의 딸 |
형제 | (형) 남효우(南孝友); 직장(直長) |
처_장인 | 유씨(柳氏); 유자화(柳子和)의 딸 |
자녀 | (1자) 남경춘(南慶春); 문과 급제, 통례원 통례(通禮)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효의(南孝義) |
총론
[생몰연대미상 = 70세 이상(추정).] 조선 전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판서(判書)⋅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이다. 자(字)는 중유(仲柔)이고, 호(號)는 지재(志齋), 또는 지소재(志素齋)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남회(南恢)이고, 어머니 박씨(朴氏)는 박소정(朴蘇貞)의 딸이다. 사헌부 감찰(監察)남준(南俊)의 손자이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의 사촌동생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1년(중종 6)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서, 1514년(중종 9)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517년(중종 12) 함경도에 흉년이 들어서 농작물이 재해를 입자, 함경도 각 고을의 재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재상(災傷: 재해)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함경도에 가서 여러 고을을 순찰하며, 재해의 상황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수령들을 처벌하였다.[『중종실록』 12년 윤 12월 14일 3번째기사]
1518년(중종 13) 황해도 도사(都事)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
1519년(중종 14)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1520년(중종 15)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 봉상시 첨정(僉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522년(중종 17)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523년(중종 18) 함경도 군적(軍籍)을 정리하는 군적(軍籍)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군적의 업무를 잘못 처리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추고(推考: 심문)를 받았다.[『중종실록』 18년 6월 25일 2번째기사]
1524년(중종 19)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세자 인종을 가르쳤다.
1525년(중종 20) 사섬시 첨정(僉正)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1527년(중종 22)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는데, 동부승지남효의가 대간(臺諫)의 상소를 임금에게 입계(入啓: 내전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아뢰는 것)할 때 대간의 일부 말을 빠뜨린 것이 있었기 때문에,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추문(推問: 심문)을 받았다.[『중종실록』 22년 7월 18일 1번째기사]
1528년(중종 23) 호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
1529년(중종 24)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고,1530년(중종 25)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532년(중종 27)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에 전라도 관찰사가 장계(狀啓)하기를, “전주부윤남효의가 옥사(獄事)를 공평하게 다스리고 성품이 너그럽고 몸가짐이 청렴하여 누명을 쓴 백성들이 없어서 온 고을이 편안합니다.”하니, 중종이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찝) 1벌을 상으로 하사하였다.[『중종실록』 27년 2월 30일 1번째기사]
1533년(중종 28)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었는데,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그때 성절사 남효의(南孝義)가 부험(符驗: 신분증명서)을 반납하고, 또 중국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명나라 관리들의 청구하는 서간(書簡)을 입계(入啓)하였다.[『중종실록』 28년 11월 4일 3번째기사]
1534년(중종 29) 한성부 우윤(右尹)이 되었다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1536년(중종 31)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1537년(중종 32) 형조 참판(參判)이 되어, 진하사(進賀使)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8년(중종 33)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1539년(중종 34)에 함경도에 가뭄이 들자,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 6천 석을 지원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마침비가 흡족하게 내려서 가을의 수확을 제대로 거둘 수 있게 되자, 양곡을 보내지 말라고 장계(狀啓)하였다.[『중종실록』 34년 7월 19일 1번째기사]
1540년(중종 35) 조정으로 돌아와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
1541년(중종 36) 한성부 좌윤(左尹)이 되었고, 1544년(중종 39)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
인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형조는 송사(訟事)가 번다하므로 늙고 병든 남효의가 판서(判書)를 맡아보기에는 매우 힘이 들었으므로 마침내 사직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8년(명종 3) 영의정홍언필(洪彦弼)이 아뢰기를, “남효의(南孝義)는 나이가 70세가 넘었으니, 비록 기로소(耆老所)의 당상(堂上)은 아니지만 기영회(耆英會)에 참석하게 하소서.”하니, 명종이 이를 허락하였다.[『명종실록』 3년 9월 8일 2번째기사]기영회(耆英會)은 임금이 종2품 이상 대신에게 축수(祝壽)하는 잔치를 내리는 기영연(耆英宴)을 말하는데, 이때 남효의는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기영회에 참석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너그럽고 청렴하였다.[『중종실록』 27년 2월 30일 1번째기사]
1527년(중종 22)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동부승지남효의가 대간(臺諫)의 상소를 임금에게 입계(入啓)할 때 대간의 말을 빠뜨린 것이 있다고 하여,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추고(推考)를 받았다. 그때 중종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제 대관(臺官)에서 동부승지가 ‘사체(事體)가 매몰될 것이다.’라는 말을 빠뜨리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고 하여, 동부승지를 파직시키고 추문(推問)하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를, ‘동부승지가 처음에는 입계(入啓)하고 나중에 전지(傳旨: 임금의 명령)에는 넣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여, 승전색(承傳色)에게 물었더니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하였으므로, 나는 동부승지가 입계(入啓)한 것이라고 대관(臺官)에게 대답하였다. 지금 내가 다시 자세히 생각하여 보니, 동부승지가 정말로 입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것은 지극히 잘못되었다. 처음에는 동부승지가 입계하지 않았다가 추후하여 전지(傳旨)에 부표(附表)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잘못되었다. 동부승지남효의(南孝義)는 파직시키고 추문(推問)하게 하라.” 하였다.[『중종실록』 22년 7월 18일 1번째기사] 동부승지는 신하와 임금 사이에 오가는 말을 전달하는 승전색(承傳色)을 맡아보는데, 임금이 내전(內殿)에 있고 신하를 직접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승지는 합문(閤門)을 넘나들며 신하와 임금 사이에 오가는 말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야 한다. 이때 동부승지남효의가 ‘사체가 매몰될 것이다.’라는 말을 빠뜨리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기 때문에,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추문을 받았던 것이다.
1533년(중종 28) 중추부 지사(知事)남효의가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성절사 남효의가 부험(符驗)을 반납하고, 종종에게 비밀히 아뢰기를, “신이 중국 북경(北京)에 갈 때 성상께서 잇가나무[伊叱可木]에 대하여 확실히 알아오라는 전교(傳敎)가 있었는데, 중국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이를 물었더니,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명나라 호위하는 서반(西班: 무관)들의 말로는 ‘그것이 필시 삼목(杉木)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곳에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대답하고, 유명한 한의(漢醫) 몇 사람을 소개하였습니다. 중국의 명의(名醫)를 찾아가서 물었더니, 그들은 ‘삼목은 진[液]이 없는데, 이것은 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회목(檜木)일 것이다.’ 하였으며, 또 태의사(太醫司)에 물었더니, 그들도 역시 서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므로,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중종이 성절사 남효의에게 내의원의 탕제(湯劑)에 쓸 잇가나무[伊叱可木]를 중국에서 구해 오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이 당약(唐藥: 중국 한약)을 국산화한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희귀한 약제를 중국에서 구해오는 것이 사신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던 것이다.
또 남효의가 종종에게 조용히 아뢰기를, “신이 중국에 갈 때에 장인(匠人)을 데리고 가서 이두석(泥豆錫: 주석의 하나)으로 금(金)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라는 전교(傳敎)가 있었으므로, 신이 당초부터 임기응변으로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고, 북경에 도착한 후에도 다방면으로 문의하였지만, 심지어 북경 사람들은 사리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치를 따져보라. 이두석을 가지고 금을 만드는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올 때 통사(通事)를 통하여 ‘은박(銀箔)을 가지고 훈금(燻金)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배우기 위하여 그 공인(工人)을 초청하였는데, 그 공인이 오기는 했으나, 명나라의 금법(禁法)을 무서워하여 거짓 못 만드는 척하는 바람에 온종일 만들도록 하였으나 끝내 금(金)같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신들이 다방면으로 구슬려 보기도 해보고 혹은 화까지 내었더니, 그 공인이 ‘사신이 돌아갈 때 내가 미리 통주(通州)에 가서 있다가 그곳에서 가르쳐 주겠다.’ 하기에 그렇게 하기로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신들이 돌아오는 길에 통주에 당도하니, 과연 그 공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 값을 치르고 일을 시켜 훈금하는 법을 보니, 금빛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훈금법을 배워왔는데, 금박(金箔)을 가지고 저절로 변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 수가 있으며, 거기에 들어가는 물명(物名)도 모두 적어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다. 이때 남효의가 ‘은박(銀箔)을 가지고 훈금(燻金)하는 방법’을 중국에서 배워왔던 것이다.
후손
부인 유씨(柳氏)는 유자화(柳子和)의 딸이다.[<방목>]
아들 남경춘(南慶春)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남씨대동보(南氏大同譜)』
- 『묵재집(默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지퇴당집(知退堂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학포집(學圃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