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일기(南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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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 동향을 기록한 일기.

개설

『남한일기(南漢日記)』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일기는 대개 개인이 간행한 일기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의하면 관찬 『남한일기』도 작성되어 궁중에서 전해졌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궁중에서 전하는 것이든 사찬이든 대부분의 내용은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 이후부터 약 47일간의 항전 과정에서 이루어진 국정 운영이나 이에 대한 대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남한일기』는 현재 사찬 몇 종이 전한다. 석지형(石之珩)을 비롯해 감상헌(金尙憲), 유계(兪棨) 등이 찬술한 『남한일기』가 그것이다. 이 밖에도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 남잡(南磼)의 『병정일기(丙丁日記)』를 비롯해 석지형의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등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이후 약 47일간의 동향을 기록하고 있다.

사찬 『남한일기』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에서 궁궐에 소장되었던 『남한일기』라는 서명이 확인된다. 즉 1754년(영조 30) 5월 왕이 훈련대장김성응(金聖應)에게 『남한일기』를 인용하며 융정(戎政)을 강화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영조실록』 30년 5월 11일). 그리고 『승정원일기』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인 1745년 6월 19일의 왕의 발언을 통해서 『남한일기』 1권이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등장하는 『남한일기』는 현재 전하는 사찬의 『남한일기』와 내용이 거의 유사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동일한 책인지는 알 수 없다.

잘 알려진 석지형의 『남한일기』의 경우 1754년에 이기진(李箕鎭)이 작성한 발문(跋文)에서는 민간에 전하는 『남한일기』를 수소문해서 등사하여 보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미 이전에 『남한일기』가 존재했고 궁중에서는 쉽게 읽어볼 수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궁중에서 전하던 『남한일기』는 민간과는 별도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 사항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남한일기』 기록은 사찬 『남한일기』와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궁중에서 전하는 『남한일기』는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서지사항은 알 수 없다.

구성/내용

궁중에서 전해지던 『남한일기』는 1746년(영조 22) 5월 당시에 진행 중이던 『승정원일기』의 개수(改修) 작업에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로 인해 현전하는 『승정원일기』의 1636년(인조 14) 12월 26일 기록에서부터 1637년(인조 15) 1월 30일까지 기록의 많은 부분이 궁중에서 전하던 『남한일기』를 전거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일기』는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이후로부터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하던 상황까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영조실록』 38년 4월 25일). 『승정원일기』에 반영된 『남한일기』에는 1636년 12월 26일에 이경직(李景稷)이 왕을 면대하는 자리에서 후금군에 사신을 보내는 문제를 비롯해 후금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보내는 서신이 수록되었다. 신하들의 상소 이외에도 전쟁을 위한 군량의 조달 문제와 군사의 확보 문제 등, 신하들의 문안 기록과 관원의 인사 상황 등이 수록되었다. 이처럼 『남한일기』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 측의 대응 모습을 살피는 데 유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일환, 「병자호란 남한산성 경험의 ‘재화(再話)’ 과정과 그 의미 : 무인 형상화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3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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