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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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 이운규가 『정역』을 바탕으로 창도한 개벽 사상.

개설

조선 왕조가 내우외환으로 인해 통치 기능을 상실하여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가던 19세기 말, 두 가지 대표적인 민중 사상이 등장하였는데 하나는 동학이고 다른 하나가 남학이다. 남학은 동학이 발생한 1860년을 전후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연담이운규에 의해 창도되었다. 양자는 모두 민중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 아래로부터의 사상이었다. 동학이 한국의 전통적인 ‘하늘’을 중심으로 만물 평등과 인간 존엄에 중점을 둔 반면에, 남학은 일종의 역학 사상인 ‘정역(正易)’을 바탕으로 장차 다가올 후천 세계의 변화를 맞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용 및 특징

19세기 말 조선 민중들의 상황은 토지 겸병으로 인해 생업을 잃고 떠돌면서 살아가는, ‘민중들이 한 때도 편안함이 없는[民無四時之安]’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불안에 대한 민중들의 사상적 표출이 바로 동학과 남학이었다(『고종실록』 32년 3월 22일). 당시에 남학은 『고종실록』에 동학과 병칭되어 일컬어질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세력이었다(『고종실록』 32년 3월 10일).

남학의 핵심적인 내용으로는 정역과 후천 개벽, 그리고 오음주송(五音呪誦)과 영가무도(靈歌舞蹈)를 들 수 있다. 남학의 교리에 의하면, ‘음·아·어·이·오’의 5음을 주송하면 오장이 수련되고, 이것으로 노래하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춤이 되고, 이것이 극치에 달하면 질병이 치유된다고 한다. 이처럼 남학 교도들은 오음주(五音呪)를 외우면서 춤을 추기 때문에 남학을 다른 말로 영가무도교(靈歌舞蹈敎)라고도 불렀다.

변천

남학은 이운규에 의해 창도된 이후 10여 개의 분파로 나뉘는데, 이때에 비로소 교단도 만들어진다. 10여 개의 분파는 다시 충청남도 논산을 중심으로 한 김일부 계와 전라북도 완주를 중심으로 한 김치인 계의 두 계통으로 크게 나뉜다.

김일부는 김항 또는 김재일이라고도 하는데, 이연담의 아들 이일수로부터 가르침을 전수 받은 인물로, 자신의 교단을 ‘무극대도’ 또는 ‘대종교’라고 칭했다. 반면에 김치인은 호가 ‘광화’로, 그의 교단은 ‘오방불교(五方佛敎)’ 또는 ‘금강불교(金剛佛敎)’라고 불렸다. 이들은 모두 『정역』을 바탕으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는 각각 유교적 접근과 불교적 접근이라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대종교에서는 김일부를 후천 정역의 운세를 밝혔다고 하여 후천 개벽의 지도자로 본 반면에, 오방불교에서는 김치인을 미륵불의 강림으로 보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일 때에 남학 역시 그에 자극을 받아 전라북도 진안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 지역에 사는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만 명이 넘는 신도들이 모여 거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총궐기를 도모했는데, 내부 밀고자에 의해 거사 계획이 관군에 발각되어 출정 직전에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이강오, 「남학계 총론」, 『한국신흥종교총람』, 1992.
  • 이강오, 「남학에 관한 소고」, 『한국문화인류학』10-1,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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