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혁(南泰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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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4년(숙종 10)∼1759년(영조 35) = 76세.]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여휘(汝輝)이고, 호(號)는 주선(酒仙)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남준명(南浚明)이고, 어머니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선교랑(宣敎郞)신선호(申善浩)의 딸이다. 세종 때 좌의정남지(南智)의 10대손이고, 영조 때 도승지(都承旨)남취명(南就明)의 5촌 조카이다. 50세가 넘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영조 시대 활동

1729년(영조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6세였다.[<사마방목>]

1735년(영조 11) 원자(元子: 사도세자)가 수두(水痘)를 앓다가 쾌유하였다고 하여 시행한 정시(庭試)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2세였다.[<문과방목>] 남태혁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으므로, 바로 6품의 예조 좌랑(佐郎)과 병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나이 50세가 넘어서 과거에 급제하는 경우에는 승륙(陞六)하여 6품의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영조가 청빈(淸貧)하다고 인정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실록(實錄)』에서 보면, 남태혁은 사헌부에서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와 사간원에서 정언(正言)⋅헌납(獻納)⋅사간(司諫)을 역임하면서 직언(直言)을 곧잘 하여, 영조의 신임을 얻었다.

1740년(영조 16)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1741년(영조 17) 사헌부 장령이 되어 오랫동안 활동하였고, 1746년(영조 22) 사간원 헌납이 되어 직언을 서슴없이 하였다.

1751년(영조 27)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고, 1753년(영조 29) 사헌부 지평을 거쳐, 1754년(영조 30)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어 활동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758년(영조 34) 공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75였다.[『영조실록』 34년 3월 5일 1번째기사]

남태혁의 신도비(神道碑)에 보면, 사헌부와 사간원 이외에도 다양한 내외 관직을 역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내직(內職)으로는 예조⋅병조의 좌랑(佐郎)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헌납⋅사간과 사헌부의 지평⋅장령⋅집의를 두루 역임하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보덕(輔德)을 지냈고, 종부시⋅봉상시⋅장악원의 정(正)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중추부⋅돈녕부의 동지사(同知事)가 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고,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외직(外職)으로는 포천현감(抱川縣監)과 공청도(公洪道: 충청도)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개성부 소윤(少尹)에 임명되었다.[신도비명]

1759년(영조 35) 3월에 공조 참판으로 재임하던 중에,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76세였다.[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성격이 순박하고 온화하여 남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으며, 항상 술을 좋아하여 거나하게 취할 때까지 마셨다.[신도비명] 이에 주위 사람들이 그를 ‘주선(酒仙: 술의 신선)’이라고 불러서, 그의 호(號)가 되었다.

남태혁은 1684년(숙종 10) 9월에 서울[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남준명(南浚明)과 어머니 신씨(申氏) 사이에 4남 1녀 중에서 넷째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형 세 사람은 모두 일찍이 죽고, 남태혁과 누이만이 살아남았다. 아버지 남준명도 젊은 나이로 돌아가고 할아버지 남경훈(南景熏)도 일찍 돌아가서, 모두 진사(進士)에 그쳤다. 그러나 남태혁만은 홀로 76세까지 오래 살고, 벼슬도 종2품 참판이 되어, 아버지와 조부가 모두 이조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당시 종2품 대신은 그 부모와 조부모를 추후하여 증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남태혁은 나이 6세 때 아버지 남준명(南浚明: 1654~1689)이 36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이에 남태혁은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려고 애를 썼으며, 형들이 죽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만년에 아들 두 사람을 잃었는데, 염빈(斂殯: 거두어 염하는 것)할 때 한번 곡(哭)하고 나서 두 번 다시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 직곡(直谷)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여암유고(旅庵遺稿)』 권11]

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현령(縣令)이경무(李景茂)의 딸인데,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남석로(南碩老)는 일찍 죽었고, 차남 남현로(南顯老)는 제용감 판사(判事)⋅휘령전 참봉(參奉) 등을 지냈고, 삼남 남기로(南頎老)는 일찍 죽었으며, 외동딸은 정언(正言)이성오(李性吾)의 처가 되었다.[신도비문] 남태혁이 돌아간 뒤에 1772년(영조 48) 영조는 남태혁의 청빈(淸貧)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서, 그 아들 남현로를 휘령전 참봉에 임명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행록(燕行錄)』
  • 『여암유고(旅庵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