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적(南泰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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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9년(숙종 15)∼1757년(영조 33) = 69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전라도 좌수사(左水使)⋅청주영장(淸州營將)⋅통진부사(通津府使)이다.자(字)는 희중(熙仲)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남숙(南䃤)이다. 세종 때 좌의정남지(南智)의 9대손이고, 금군별장(禁軍別將)남태징(南泰徵)의 4촌 동생이다.

숙종 시대 활동

1714년(숙종 40) 증광(增廣)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무과방목>] 숙종 말년에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철산부사(鐵山府使)가 되었다. 철산부사남태적이 고과 평가에서 가장 성적이 높았고 무예도 뛰어났다.

경종 시대 활동

경종 시대 노론(老論)이 경종이 병약하다고 하여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하자, 소론(少論)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이 노론 4대신(大臣)을 탄핵하여 유배시켰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영조 시대 활동

경종이 갑자기 죽고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서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老論)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커지자, 소론의 강경파 박필현(朴弼顯)⋅심유현(沈維賢)⋅정희량(鄭希亮) 등은 일찍이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南人)과 손을 잡고 노론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변(政變)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영조를 폐위시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자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옹립하려고 하였다.

1726년(영조 2) 남태적은 청주영장(淸州營將)이 되었다가, 1727년(영조 3)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통진부사(通津府使)가 되었는데, 이때 남인 출신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충청도 병사를 죽이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 소론의 박필현⋅정희량 등은 이인좌의 반란을 확대하여 3남 지방에서도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여, 마침내 <무신(戊申) 반란>이 일어났다. 또 그들은 평안도 병마사이사성(李思晟)에게 군사를 서울로 출동시키고, 금군별장(禁軍別將)남태징(南泰徵)이 이에 호응하고, 남태적⋅이정(李檉)이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점령하고 밀풍군을 추대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인좌가 반군을 이끌고 서울로 북상하다가, 안성에서 병조 판서오명항(吳命恒)의 토벌군에 패배하여,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고 처형되었다. 남태적과 남태징은 집안이 소론에 속하였으나, 실제로 박필현 등의 반란을 모의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군을 심문할 때 공초(供招)에 그 이름이 여러 차례 거론되었으므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남태적은 끝까지 자복하지 않고 결백을 주장하였으므로, 영조가 사형을 면제하여 외딴 섬으로 유배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박필현(朴弼顯)과 남태적의 관계를 의심하여 남태적의 죄를 끊임없이 탄핵하였다. 남태적이 박필현의 6촌인 박필장(朴弼長)과 형제의 의리를 맺고 친형제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1734년(영조 10) 남태적은 유배지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는데, 대간에서 남태적을 처형하도록 주장하였으나, 영조가 이를 용서하고 외딴섬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1757년(영조 33) 남태적은 유배지 절도(絶島)에서 쓸쓸히 돌아갔는데, 향년이 69세였다.

1864년(고종 1) 귀양지에 죽은 인물에 대하여 사면 조치가 내려지자, 남태적도 죽은 지 1백여 년이 지나서 죄명을 벗게 되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728년(무신년) <이인좌의 난> 때 남태징이 금군별장(禁軍別將)으로서 극악한 역적들의 옥사에 걸려서 처형되었다. 남태적은 그의 사촌동생으로 역적들의 거짓 자백에 걸려들어, 통진부사(通津府使)로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고문을 받고 심문을 받다가,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끝내 자복하지 아니하여, 오래도록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영조가 그의 무죄한 것을 가엾게 여기고, 나라에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는 기회를 틈타서, 남태적을 죽이지 말고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극력 반대하여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였다.

어느 날 영조가 온천에 행차할 적에 대간들이 모두 어가(御駕)를 수행하자, 영조가 선전관(宣傳官)에게 밀지(密旨)를 주면서 명하기를, “빨리 서울로 돌아가서, 도성 남문(南門)에 들어가거든, 이것을 펴보고 그대로 실행하라.” 하였다. 선전관이 서울에 도착하여 밀지를 펴보니, 바로 남태적을 방면하여 귀양보내라는 전교(傳敎)였다. 이에 남태적은 출옥하자, 몇 해 전에 이미 별세하신 어머니 상례(喪禮)를 그제야 치르고, 상례를 치르기 위해서 풀어헤쳤던 머리를 묶고 유배지로 떠났다. 그때 그의 아내와 첩(妾)이 그를 만나보기를 간청하였으나, 만나 주지 않고 그대로 떠나갔다. 그의 첩은 철산(鐵山) 출신 기생이었는데, 남태적이 체포되자,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뒤에 그의 첩은 그의 아내와 함께 품팔이하면서 30여 년 동안 열심히 귀양 간 남태적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영조가 자기를 몰아내려고 모의한 신하들의 억울한 사연을 이토록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으니, 신하가 된 자가 누구인들 감읍(感泣)하여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남태적이 영조의 보살핌을 받아서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은 것은 그도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행위가 있어서였을 것이다.[『창성잡기(靑城雜記)』 권3]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 『무과방목(武科榜目)』
  • 『백일헌유집(白日軒遺集)』
  • 『여암유고(旅菴遺稿)』
  • 『연석(燕石)』
  • 『유회당집(有懷堂集)』
  • 『청성잡기(靑城雜記)』
  • 『학당유고(鶴塘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