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유(南重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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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6년(인조 4)∼1701년(숙종 27) = 76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정랑(正郞)⋅사헌부 감찰(監察)이다. 자(字)는 공진(公鎭)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강원도 영월(寧越)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監察)남두화(南斗華)이고, 어머니 여흥민씨(驪興閔氏)는 울산부사(蔚山府使)민여검(閔汝儉)의 딸이다. 남병사(南兵使) 남응운(南應雲)의 현손이고, 성균관 직강(直講)남중계(南重繼)의 조카이다. 정파는 남인(南人)에 속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60년(현종 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사마방목>] 음서(蔭敍)로 충청도대흥군수(大興郡守)를 지냈다. 1663년(현종 4) 서인의 태두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학문과 도덕을 비난하고,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거(停擧: 과거를 보지 못하는 것)를 당하였다. 이에 서인(西人)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집권하던 현종 때 12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숙종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유배하고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을 등용하였다.

1676년(숙종 2) 남중유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용되었다.

1678년(숙종 4) 종부시 주부(主簿), 사헌부 감찰(監察), 형조 좌랑(佐郎)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충청도청산현령(靑山縣令)으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처음에 청산현의 고을 창고가 대부분 헐어서, 곡식을 밖에다 잔뜩 쌓아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 지키도록 하였다. 현령남중유가 자기 녹봉을 덜어서 고을 창고를 고쳐 지으니, 곡식도 상하지 않고 백성도 수고롭지 않게 되었다. 이에 청산 고을 백성들이 남중유의 덕을 칭송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영의정허적(許積)이 죽음을 당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남중유도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1681년(숙종 7) 감시(監試)의 시권(試券) 가운데 익명의 상변서(上變書)에서 ‘남중유가 김환(金煥) 등과 함께 김포 근처의 해도(海島)에서 모여서 비밀 결사를 만들어 서인을 몰아내기 위한 반역을 도모한다는 참소를 당하였으나, 숙종이 상변서를 불태워버리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서인이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 공조 정랑(正郞), 사직서 령(令)을 역임하였다.

1690년(숙종 16) 대흥군수(大興郡守)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교활한 아전을 규찰하고 부역을 공평하게 하고 조세를 줄이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남중유는 다시 파직되었다. 경기 평택 진위현(振威縣)의 통천(桐泉) 별장에서 꽃과 채소를 가꾸며 손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늙은이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1701년(숙종 27) 4월 18일에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76세였다. 저서로는 『위혜병(威惠幷)』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은 엄격하면서도 화통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너무 꼿꼿하여 남을 인정해 주는 데에 야박하였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겉치레로 하지 않았고 귀천을 구분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질서 정연한 원칙이 있었다. 늙어서도 조상을 모시는 데에 태만한 적이 없었으며, 제사 의식은 반드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라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았다. 자손들을 훈도할 적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집안을 청소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등 우선 작은 일부터 착실하게 배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비록 딸이라고 하더라도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그 대의를 알고 생활하도록 하였다. 아래로 미천한 노복들까지도 집안에서 감히 뛰어다니거나 고함지르지 못하게 하였다.

1679년(숙종 5) 충청도청산현령(靑山縣令)으로 나갔을 때 당시 충청도 병마사(兵馬使)가 청산현에 행차하여 군대를 점고할 시기인데, 기일이 상당히 지나도록 병마사가 오지 않았다. 청산현의 군사들이 교외에서 기다린 지 7, 8일이 되자, 자기가 가지고 간 양식이 다 떨어져서 서로 눈을 흘겨보며 원망하고 괴로워하였다. 이에 현령남중유가 당장 군사들을 해산하여 귀가하도록 조처하였다. 병마사가 뒤늦게 도착하여 몹시 화를 내고 불호령하자, 고을 안이 물 끓듯이 술렁거렸다. 이때 현령남중유가 곧장 나아가서 병마사를 뵙기를 청하고, 병마사를 만나자, 현령남중유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揖)하며 말하기를, “현령은 응당 쫓겨날 관원이니, 감히 공적인 예로 뵐 수 없습니다.”하니, 병마사가 꾸짖으며 묻기를 “군사를 점고하는 일은 중대한 일인데, 지금 대기하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현령남중유가 침착하게 대답하기를 “군사들이 해산하고 돌아간 것은 바로 현령이 지시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법에 보면, 정해진 날짜에 지휘관이 오지 않은 데에 대한 율문도 있는데, 그 죄는 누가 져야 합니까.” 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병마사가 자리에서 황급히 내려와서 현령남중유에게 허리를 굽혀서 사과하고 곧장 말을 타고 다른 고을로 떠나버렸다.[비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구칙방(九則坊) 갈산리(葛山里)의 언덕에 있는데, 선부인과 후부인을 좌우에 합장하였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과 모헌(慕軒) 강필신(姜必愼)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59, 『모헌집(慕軒集)』 권6]

첫째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좌랑(佐郞)심설(沈忄卨)의 딸인데, 일찍 돌아가서 자식이 없고, 둘째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심수공(沈壽公)의 딸인데,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남수교(南壽喬)는 생원이고, 차남은 남수종(南壽宗)이고, 삼남 남수현(南壽賢)은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 장녀는 이회근(李晦根)에게, 차녀는 참봉조구령(趙九齡)에게, 삼녀는 이언형(李彥馨)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남정(南錠)은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武官)이 되었고, 차남은 남수석(南壽錫)이고, 딸은 홍유원(洪裕源)에게 시집갔다.[묘갈명]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사마방목(司馬榜目)』
  • 『도곡집(陶谷集)』
  • 『도암집(陶菴集)』
  • 『동리집(東里集)』
  • 『모헌집(慕軒集)』
  • 『무하당유고(無何堂遺稿)』
  • 『서파집(西坡集)』
  • 『성호문집(星湖文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시남집(市南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아재집(聱齖齋集)』
  • 『위혜병(威惠幷)』
  • 『일봉집(一峯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