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사(南怡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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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예종 즉위)에 유자광의 무고(誣告)로 남이 등이 처형된 사건.

개설

1467년(세조 13)에 남이(南怡)는 이시애란(李施愛亂)의 진압과 여진족 중 가장 강한 건주위(建州衛)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지만,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에 대한 세조의 총애를 비판하다 하옥되기도 하였다. 예종 즉위 직후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남이가"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유자광(柳子光)이 그가 반역을 꾀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 훈척(勳戚), 즉 훈신과 척신 그리고 예종의 합의 하에 남이는 처형되었다.

역사적 배경

남이(南怡)는 의산군(宜山君)남휘(南暉)와 태종의 4녀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손자이다. 1457년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발영시는 세조 12년(1466) 5월, 정2품 이하 관료가 보았던 임시 과거 시험으로서, 재상이 처음으로 시험에 나아간 과거 시험이었다.

1467년 이시애 난을 진압할 때 가장 용감하고 많은 전과를 올려 적개(敵愾) 1등 공신으로 책훈되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적개공신 45명 중 31명이 무인일 정도로 이시애 난 때 무인들의 활약이 컸다. 얼마 후 자신들이 공격하려는 건주위 여진 정벌에 협공하라는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군사 1만 명을 출동시켰는데, 남이는 우상대장으로서 가장 골칫거리였던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제거하는 큰 공훈을 세웠다(『세조실록』 13년 10월 10일).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한명회·신숙주 등과 함께 세종·문종 때부터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 한명회·신숙주 등은 이시애 난에 연루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난을 진압한 귀성군 이준·남이 등의 권력은 강화된 상태였다.

남이는 공명심이 강했고, 무재(武才)를 드러내려는 급한 면모 때문에 세조에게 질책을 받았다. 세조는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와 귀성군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력 간에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무장 세력의 대표 격인 남이가 세조의 귀성군 총애를 비판하는 등 반발하였다(『세조실록』 14년 5월 1일).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세조가 승하하였고, 19세인 예종이 즉위하면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남이는 처음에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그의 위상 강화를 꺼린 훈구 관료들의 비판으로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발단

유자광이 고발하기를, 남이가 혜성의 출현을 보고 세조대 이래 훈구인 노사신(盧思愼)·김국광(金國光) 등을 간신으로 지목하고, 예종이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강화함으로써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엽관운동(獵官運動)을 벌이던 분경(奔競)을 엄히 단속할 때에 일을 꾸며 그들을 처단하고자 했다고 하였다. 민서(閔敍)는 남이가 한명회를 간신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려 했다고 밝혔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4일).

예종이 분경을 엄히 금지한 것은 훈척 대신에 대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남이는 세조 14년 8월 병조 판서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총관(摠管)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세조실록』 14년 8월 23일). 훈척들의 정치적 위상이 약화된 상태에서 남이가 한명회·신숙주·노사신·김국광 등을 제거하려 했다고 유자광이 고변한 것은, 훈척과 이시애 난 이후 대두한 남이 같은 무인들 간에 정치적 반목이 생겼음을 보여 준다. 또한 예종이 분경금지법을 엄하게 시행하려는 조치를 취한 직후 남이옥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이가 예종의 정책에 비판적이었고, 그 결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경과

남이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유자광과 대질(對質)한 후에 그가 무고한 사실을 알았다. 관련자인 민서·문치빈(文致彬)·이지정(李之楨)·탁문아(卓文兒)·강순(康純)·이수붕(李壽朋) 등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문효량(文孝良)은, 남이가 거사 시기를 한명회 등이 산릉에 나아갈 때로 잡고, 한명회·영순군(永順君)·구성군을 차례로 제거한 후 왕까지 제거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고 복초(服招)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6일). 남이의 역모 사실을 확정한 것이다. 남이는 산양군(山陽君)강순이 보성군(寶城君)이합(李峇)의 아들 춘양군(春陽君)이래(李徠)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고 자백하였다. 여러 사람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관련자 가운데 강순·남이·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량·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조경치(曹敬治) 등이 저자에서 거열(車裂)에 처해졌고, 7일 동안 효수(梟首)되었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7일). 남이의 어머니도 거열에 처해졌다.

남이옥사의 결과 새로 부상한 무장 세력은 와해되었다. 반면 영의정인 귀성군 이준을 비롯하여 유자광·신숙주·한명회 등은 익대(翊戴)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약 1개월 동안 영의정으로 있던 박원형(朴元亨)이 물러난 후 곧이어 한명회가 영의정에 제수되었다(『예종실록』 1년 1월 23일). 무장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훈척이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1818년(순조 18)에 이르러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유자광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고 300년 동안 죄인으로 기록되었던 영의정 강순과 병조 판서 남이의 신원과 복관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남이의 관작이 회복되었다(『순조실록』 18년 3월 10일).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 정두희, 『조선 초기 정치 지배 세력 연구』, 일조각, 1983.
  • 최영호, 「‘남이(1441~1468)의 옥’ 재고」,『역사와 인간의 대응-고병익선생 회갑기념 사학논총』,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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