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응운(南應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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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9년(중종 4)∼1587년(선조 20) = 79세.] 조선 전기 중종~선조 때의 문신. 서예가. 행직(行職)은 예조 참판(參判)⋅공조 참판⋅남병사(南兵使)이다. 자(字)는 치원(致遠)이고, 호(號)는 국창(菊窓), 또는 난재(蘭齋)⋅관원(灌園)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남세건(南世健)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이윤식(李允湜)의 딸이다. 좌의정남지(南智)의 현손이고, 공조 참의남응룡(南應龍)의 형이다. 또 도승지남근(南瑾)의 아버지이고, 이조 판서남이공(南以恭)의 조부이다. 훈구파의 영수 영의정남곤(南袞)의 8촌으로서 훈구파에 속하였으나, 대윤(大尹)⋅소윤(少尹)의 싸움에 중립을 지키려고 하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사마방목>]

1535년(중종 30)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문과방목>]

1537년(중종 32) 교서관 검열(檢閱)을 거쳐, 1538년(중종 33)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에 앞장섰는데, 김안로는 세자 인종(仁宗)을 보호하려고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대립하다가, 배척을 당하였다.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으나, 사관(史官)의 직책을 소홀히 한다고 탄핵을 받아, 평안도 강계판관(江界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인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명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에 대윤(大尹)의 잔여 세력을 탄핵하여 추방하였는데, 인종 때 대윤(大尹)의 윤임(尹任)이 등용한 사림파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사림파의 사관들이 그를 혹평하였던 것이다. 소윤(少尹)의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정권을 잡고 국정을 농단하자, 1549년(명종 4) 이기(李芑)⋅윤인경(尹仁競)⋅정순붕(鄭順朋) 등 소윤의 강경파를 탄핵하였으나, 윤원형이 그들을 보호하여 실패하였다. 이에 남응운은 함경도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551년(명종 6) 조정으로 돌아와서,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고, 1552년(명종 7)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는데, 그해 6월에 아버지 예조 참판(參判)남세건(南世健))이 돌아가자, 동생 남응룡(南應龍)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4년(명종 9)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555년(명종 10) 동생 남응룡이 3년 동안 시묘살하다가, 병을 얻어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42세였다.

1557년(명종 11) 조정으로 돌아와서, 형조⋅병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1559년(명종 13) 다시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나갔는데, 남응운은 문무(文武)를 겸전하였기 때문에 남병사(南兵使)를 역임하였던 것이다.

1561년(명종 15) 조정으로 들어와서 한직인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1564년(명종 18) 경기 관찰사로 나갔고, 1565년(명종 19)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선조가 즉위하여, 사림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으나, 선조 초기에 남응운은 예조 참판(參判)과 공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570년(선조 3) 남응운은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으로 참여하였고, 1574년(선조 7)에 왕비의 산릉(山陵)을 봉심(奉審)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575년(선조 8) 2품 이상의 대신의 복제(服制)를 의논하는 데에 참여하였다.[『선조실록』 8년 12월 8일 2번째기사] 그 뒤에 나이가 많아지자, 벼슬에서 물러나서 은거하다가, 1587년(선조 20) 8월 5일에 노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79세였다.

성품과 일화

사림파(士林派)의 사관들이 편찬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사평(司評)을 보면, 남응운이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을 때, “식견이 없고 천박하며, 사리에 어두웠다.”하였고,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임명되었을 때, “유약하고 아첨을 잘하였다.”하였고,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성품이 청렴하지 못하다.”하였으나,[『명종실록』 20년 9월 5일 4번째기사] 사림파가 훈구파의 남응운을 혹평한 것에 자나지 않는다.

남응운(南應雲)은 23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고, 27세 때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동생 남응룡(南應龍)은 나이 21세 때 사마시 진사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형 남응운과 같이 알성(謁聖) 문과에 응시하여 22세 때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5년(중종 30) 대과(大科)에 남응운과 남응룡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여, 사람들이 ‘동방(同榜) 형제’라고 부러워하였다. 두 형제가 모두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형 남응운은 예조⋅공조 참판을 지냈고, 동생 남응룡은 공조 참의를 지냈다.

남응운은 문무를 겸전하여 문관으로서 남병사(南兵使)를 지낼 만큼 무사의 기질을 가졌으나, 동생 남응룡은 문학적 자질을 타고나서 시(詩)를 잘 지었고, 이문(吏文)에 정통하였다. 이에 사림파의 사관들이 남응룡이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을 때 남응운을 혹평하기를, “노복을 차지하려고 동생을 참소하니,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 하였다. 그러나 남응운은 유학자로서 정몽주(鄭夢周)의 충절(忠節)과 서경덕(徐敬德)의 학풍을 숭상하였다. 1573년(선조 6) 남응운이 개성 유수(留守)가 되었을 때 포은(圃隱)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고 화담(花潭) 서경덕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개성 선죽교 위쪽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이름하고, 정몽주와 서경덕을 제향하였다.[『약포집(藥圃集)』 권3] 또 남응운은 매화[梅]⋅난초[蘭]⋅국화[菊]⋅대나무[竹]의 4군자(君子)를 사랑하여 자기 집 정원에서 이를 키우며, 자기의 호(號)를 국창(菊窓: 국화 창문)⋅난재(蘭齋: 난초 집)⋅관원(灌園: 물주는 정원)이라고 불렀다. 또 남응운은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지금 「황산(荒山) 대첩비(大捷碑)」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비(碑)」·「허엽(許曄) 신도비(神道碑)」·「허종(許琮) 신도비(神道碑)」 등의 전서(篆書)가 남아 있다.

묘소와 후손

부인 신씨(辛氏)는 신세량(辛世良)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 5형제를 두었다. 장남 남관(南琯)은 판관(判官)을 지냈고, 차남 남호(南琥)는 진사(進士)로서 도사(都事)를 지냈고, 삼남 남침(南琛)은 진사(進士)로서 군수(郡守)를 지냈고, 사남 남위(南瑋)는 주부(主簿)를 지냈고, 오남 남근(南瑾)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知)⋅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돈녕부 지사(知事)를 지냈다. 손자 남이신(南以信: 남호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판을 지냈고, 손자 남이공(南以恭: 남호의 아들)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이집(簡易集)』
  • 『강한집(江漢集)』
  • 『구호문집(龜湖文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미암집(眉巖集)』
  • 『미호집(渼湖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순암문집(順菴文集)』
  • 『약포집(藥圃集)』
  • 『어우집(於于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초당집(草堂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학봉전집(鶴峯全集)』
  • 『화담집(花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