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응룡(南應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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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4년(중종 9)∼1555년(명종 10) = 42세]. 조선 전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참의(參議)이다. 자(字)는 경림(景霖)이고, 호(號)는 이요당(二樂堂)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남세건(南世健)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이윤식(李允湜)의 딸이다. 좌의정남지(南智)의 현손이고, 예조 참판남응운(南應雲)의 동생이다. 훈구파의 영수 영의정남곤(南袞)의 8촌으로서 훈구파에 속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34년(중종 29)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사마방목>]

1535년(중종 30)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문과방목>]

1536년(중종 31) 승문원 저작(著作)이 되었는데, 4관(館)에서 과거의 초시(初試)를 치르는 날, 동료(同僚)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을 때, 시험을 치르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서 시권(試券)의 답안지로서 품질이 좋은 종이에 먼저 관인을 찍어서 나누어 주었다가 발각되어, 추고(推考)를 받고 파면되었다.

1538년(중종 33) 봉상시 직장(直長)이 되었다가, 경상도 도사(都事)로 나갔다.

1542년(중종 37)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1543년(중종 38)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

인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원접사(遠接使) 정사룡(鄭士龍)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사신을 전송하고 돌아와서 인종에게 아뢰기를,“날씨가 몹시 더운데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 길을 곱잡아 빨리 가려고 호송하는 우리 군인들을 때려서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데, 착실한 차사원(差使員)을 따로 보내어 두루 구휼하여 일로(一路)의 백성들이 쓰러지거나 굶주리지 않도록 하소서. 이러한 뜻을 개성부 유수(留守)와 황해도⋅평안도 관찰사에게도 하유(下諭)하도록 하소서.”하니, 인종이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중국 명나라 사신이 오가는 길목에 있는 황해도⋅평안도의 여러 고을에서 군사와 백성들이 중국 사신을 호송하고 짐바리를 옮기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현장을 남응룡이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종에게 그 폐단을 아뢰어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어, 경연(經筵)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시강관남응룡이 어린 명종에게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기까지 그 공부가 『소학(小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하고 『소학』을 열심히 공부할 것을 건의하였다.

1546년(명종 1)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1548년(명종 3)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

1549년(명종 4)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고, 성균관 전한(典翰)을 거쳐,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어 농작물의 작황이 황폐한 사실을 자세히 보고하니, 명종이 전교하기를, “금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을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1550년(명종 5) 예빈시 정(正)에 임명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 겸 승문원 참교(參校)로서 『중종실록(中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성균관 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1552년(명종 7)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6월에 아버지 호조 참판남세건(南世健)이 돌아가서, 형 남응운(南應雲)과 함께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 동안 시묘살하다가, 병을 얻어서 1555년(명종 10) 돌아갔는데, 향년이 42세였다.

성품과 일화

남응룡은 나이 21세 때 사마시 진사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22세 때 형 남응운과 함께 알성(謁聖)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5년(중종 30) 문과(文科)에 남응룡과 남응운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자,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을 ‘동방(同榜) 형제’라고 부르며 몹시 부러워하였다. 남응룡은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시(詩)를 잘 지었고, 이문(吏文)에 뛰어났으며, 형 남응운은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무사(武士)의 자질이 있었고, 또 글씨를 잘 썼는데,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두 형제가 모두 3품의 당상관(堂上官)으로 출세하여, 남응룡은 공조 참의를 지냈고, 형 남응운은 예조 참판⋅공조 참판⋅남병사(南兵使)를 지냈다. 형이 관직이 동생보다 조금 높았는데, 남응룡은 형 남응운(南應雲)보다 5살 아래였으나, 형은 동생보다 22년이나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1546년(명종 1) 4월에 승문원 도제조(都提調)를 겸임하고 있는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신광한(申光漢)이 명종에게 아뢰기를, “지제교(知製敎)들이 정성을 다하여 표문(表文: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짓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제술(製述)하여 바친 표문이라고 할지라도 거의 쓸 수가 없습니다. 지제교 장옥(張玉)⋅남응룡(南應龍)은 전혀 글을 새로 짓지도 않았으니, 그들을 추문(推問)하도록 하소서.”하니, 명종이 아뢴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승문원에서 표문(表文)과 전문(箋文: 황태자에게 보내는 글)을 전담하였는데,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중국 궁중의 속어(俗語)인 이문(吏文)으로 제술(製述)하였기 때문에 이문(吏文)을 익혀서 잘 아는 사람만이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남운룡은 이문(吏文)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지제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표전문을 잘못 지어서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으므로 지제교들은 새로 글을 짓기를 꺼렸다. 조선 태조 때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표전문의 글자를 트집 잡아서 표전문을 지은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중국으로 보내라고 하여, 큰 외교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명종 때 지제교들이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전혀 정성을 들여서 짓지 않고 번번이 등록(謄錄)의 표문을 그대로 베껴다가 대제학에게 바쳤다. 당시 지제교의 손에 의해서 글자 한 자라도 새로 지은 것이 없었으나, 그 글을 전해 받은 대제학(大提學)도 글을 고치거나 글자를 바로잡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그 글을 그대로 중국에 보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제교와 대제학의 자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글씨를 잘 쓰는 서원(書員) 한 사람을 시켜서 등록(謄錄)의 표문을 그대로 베껴서 사대(事大)의 글로 중국에 보내더라도 충분하다.’고 하였다.[『명종실록』 1년 4월 28일 6번째기사]

후손

부인 정씨(鄭氏)는 정맹수(鄭孟壽)의 딸이다. 아들 남유(南瑜)는 무과에 급제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내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倭敵)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였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견한잡록(遣閑雜錄)』
  • 『백헌집(白軒集)』
  • 『온계일고(溫溪逸稿)』
  • 『우정집(憂亭集)』
  • 『퇴계집(退溪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학봉집(鶴峯集)』
  • 『호보(號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