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용(南有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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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98년(숙종 24)∼1773년(영조 49) = 76세.] 조선 후기 경종~영조 때의 문신. 서예가. 행직(行職)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형조 판서(判書)이고, 정조의 사부(師傅)이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자(字)는 덕재(德哉)이고, 호(號)는 뇌연(雷淵)⋅소화(小華)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남한기(南漢紀)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처사(處士) 심한장(沈漢章)의 딸이다. 대제학(大提學)남용익(南龍翼)의 증손자이고, 경상도 감사(監司)남정중(南正重)의 손자이다. 이조 정랑남유상(南有常)의 동생이고, 영의정남공철(南公轍)의 아버지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황경원(黃景源)과 가깝게 교유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영조 시대 4대 문장가’라고 일컫는다.

경종 시대 활동

1721년(경종 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였다. 이에 음서(蔭敍)로 강릉참봉(康陵參奉)⋅종묘서 부봉사(副奉事)⋅세자익위사 시직(侍直)⋅군자감 주부(主簿)⋅형조 좌랑(佐郎)⋅영춘현감(永春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활동

1740년(영조 16) 알성(謁聖)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문과방목>] 남유용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중년의 나이에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1741년(영조 17)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정언남유용이 영조에게 직언(直言)을 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전라도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

1742년(영조 18) 영의정김재로(金在魯)가 남유용의 문장을 극구 칭찬하고 그 죄를 변호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고 직첩을 되돌려 받았다.

1743년(영조 19) 홍문록(弘文錄)에 선록되었고,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임명되었다.

1744년(영조 20) 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고, 도당록(都堂錄)에 첫 번째로 선임되었다.

1745년(영조 21)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승진되었다.

1746년(영조 22)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고,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문관 응교남유용이 영조에게 임금이 가져야 할 10가지 덕목[君德十條]를 진언하고, 또 감시(監試)와 회시(會試)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인재를 시취(試取)하였다.

1748년(영조 24)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고, 숙종(肅宗)의 어진(御眞)을 모사(模寫)하는 도감(都監)의 도청(都廳)이 되어, 어진을 모사한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어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751년(영조 27) 장례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752년(영조 28) 의소세손(懿昭世孫: 사도세자의 맏아들, 정조의 형)이 돌아가자, 그 애책문(哀冊文)을 지어서 바쳤는데, 그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에 승문원 제조(提調)가 되었다.

1753년(영조 29) 예조 참판(參判)이 임명되었고, 예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가, 평안도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

1754년(영조 30)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봉상시 제조(提調)를 거쳐, 다시 예조 참판이 되었다. 그 뒤에 황해도안악군수(安岳郡守)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1755년(영조 31) 『천의리편(闡義理編)』을 찬집(纂輯)하는 당상관(堂上官)을 겸직하여, 책을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이어서 성균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비변사 제조(提調)가 되었다.

1756년(영조 32)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757년(영조 33) 원손(元孫: 정조)의 사부(師傅)에 임명되어, 3세의 어린 원손 정조(正租: 1752∼1800)을 품에 안고 글을 가르쳤다. 이어서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756년(영조 32) 예문관 제학이 되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교서(敎書)와 반사문(頒敎文)을 지어서 바쳤다.

1757년(영조 33) 1월 세 번째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 남공철의 생모)와 혼인하였는데, 그때 남유용의 나이가 60세였다.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758년(영조 34) 양관(兩館)의 대제학이 되어, 성균관 지사(知事)⋅전설사 제조(提調)⋅승문원 제조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돈녕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공조 참판이 되었고, 경상도울산부사(蔚山府使)로 나갔다.

1759년(영조 35)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었고, 1760년(영조 36) 함경도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다, 그해 9월에, 계모 심씨(沈氏)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762년(영조 38)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치고 성균관 동지사가 임명되었다가, 그해 말에 장원서 제조가 되었다.

1763년(영조 39)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평안도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

1765년(영조 41)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었는데, 중추부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

1766년(영조 42) 귀후서 제조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오랫동안 세손(世孫: 정조)을 보도(輔導)한 공으로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다시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1767년(영조 43) 남유용이 나이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기로소(耆英社)에 들어갔다. 이에 영조가 치사(致仕)를 허락하고 봉조하(鳳朝賀)에 임명하였다. 이에 남유용은 집에서 은거하며 몇 년 동안 후진(後進)을 양성하며 저술에 전념하였다.

1772년(영조 48) 중국 명나라 정사(正史)의 줄거리를 엮은 『명사정강(明史正綱)』을 완성했는데, 그 사관(史觀)이 중국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존주지의(尊周之義)의 역사관에 매우 벗어난다고 하여, 영조가 화를 내고 남유용을 파직하고 길이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1773년(영조 49) 영조가 남유용에게 관작(官爵)을 돌려주고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품(陞品)시켰다. 그해 7월 13일 남유용은 노병으로 서울 초동(草洞) 본가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76세였다.

저서로는 『명사정강(明史正綱)』이 있고, 편저로는 『천의리편(闡義理編)』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뇌연집(雷淵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1773년(영조 49) 7월 13일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남유용의 졸기(卒記)를 보면, “봉조하(鳳朝賀)남유용이 돌아갔다. 남유용은 고 대제학남용익(南龍翼)의 증손자인데, 자(字)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뇌연(雷淵)이다. 형 남유상(南有常)과 더불어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제학을 거쳐, 세손 보양관(輔養官)⋅유선(諭善)을 거쳐 벼슬이 정경(正卿)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다. 나이 70세에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봉조하에 임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갔다. 사람됨이 탄이(坦夷: 평탄)하고 순실(純實)하여 세상의 일에 대하여 담담하고 초연하였다.” 하였다.

남유용은 1698년(숙종 24) 11월 23일에 서울 서부(西部) 사직동(社稷洞)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어버지 남한기(南漢紀)와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 2남 1녀 중에서 둘째 아들이었다. 나이 11세 때 어머니 심씨(沈氏)가 돌아가고, 나이 2살 위의 동복(同腹) 형 남유상(南有常)과 함께 외롭게 자랐다. 그 뒤에 아버지가 재혼하여, 계모 심씨(沈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동생 남유상(南有常)은 이복(異腹) 동생이다. 남유용은 나이 16세 때, 첫째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와 혼인하여, 1721년(경종 11) 나이 24세 때 맏아들 남공보(南公輔)를 낳았고, 그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728년(영조 4) 나이 31세 때, 동복 형 남유상(南有常)이 병으로 33세의 나이로 돌아갔는데, 형 남유상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과 수찬과 이조 정랑을 지냈다. 형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남유용은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 용인(龍仁) 금량촌(金梁村)으로 이사하였다. 형이 죽고 난 뒤에 과거를 포기하고 음직(蔭職)으로 강릉참봉(康陵參奉)⋅군자감 주부(主簿)⋅형조 좌랑(佐郎) 등을 지내다가, 충청도 단양영춘현감(永春縣監)으로 나가서 다시 과거 공부를 시작하여, 나이가 43세 때 늦게 알성(謁聖) 문과에 급제하였던 것이다.

남유용은 아버지에게 지극하게 효도하였으나, 어머니를 일찍 여이고 모시지 못하는 것을 평생 가슴 아프게 여겼다. 형제끼리 같이 지낼 때나 자손들을 거느릴 때에 집안의 가법(家法)에 따랐다. 또 관직에 근무할 때에 청렴하고 엄격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적으로 부탁하지 못하였다. 관직을 물러나서 집에 있을 때 집안의 쌀독이 자주 비는 때가 있었으며, 죽을 때에 가난하여 미리 관곽(棺槨)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나이 2살 위의 동복(同腹) 형 남유상과 함께 자라며, 마치 지기지우(知己之友)처럼 서로 글을 짓고 비판하여 형제가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남유용은 형 남유상에 비하여 자기를 낮추어서, 자기의 호(號)를 스스로 소화(小華)라고 불렀는데, 형 남유상의 호(號)가 태화(太華)였기 때문이다.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서 은거할 때 사대부 집안의 자제(子弟) 가운데 그 문하(門下)에 찾아와서 글을 배우고 글씨를 익히는 자들이 많았다. 남유용이 조정에서 벼슬할 때 유학의 정도(正道)를 지키고 자기의 신념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영조가 그 마음을 신임하면서도 등용할 때 망설였는데, 그 중간에 권귀(權貴)들이 이간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유용이 조정에 벼슬한 30여 년 동안에 하루도 마음이 편안할 적이 없었고, 유학의 정도와 자기의 큰 꿈을 한 번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였다.[묘갈명]

남유용은 문장에 뛰어났다. 남유용이 죽고 난 뒤에 동생 남유정(南有定)과 조카 남공필(南公弼)이 남유용의 지은 시문(詩文)을 모아서 문집 『뇌연집(雷淵集)』을 편찬하였다. 1783년(정조 7) 2월에 문집 『뇌연집』이 출간할 때 정조가 그의 스승인 남유용을 기리며 『뇌연집』의 어제(御製) 서문(序文)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운각(芸閣)에 명하여 문집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해 5월에 문집 『뇌연집』이 간행되었는데, 정조가 원손(元孫) 때부터 오랫동안 사부(師傅) 남유용에게 글을 배웠기 때문이다. 남유용은 글을 좋아하는 문우(文友)로서 월곡(月谷) 오원(吳瑗)⋅진암(晉菴) 이천보(李天輔)⋅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과 가깝게 교유하였는데, 모두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영조 시대의 4대 문장가라고 일컬었다. 남유용(南有容)의 『뇌연집』을 보면, 1737년(영조 13) 10월 10일 밤에 남유용과 황경원⋅이천보⋅오원 등 4인이 함께 종암(鐘巖)에 있는 오원의 별장에 모여서 중국 당나라 두보(杜甫)의 「영회북정(詠懷北征)」이라는 시(詩)를 읽으면서 같은 운(韻)을 쓰지 않기로 하고 돌아가며 연구(聯句)의 시를 850언(言)이나 지었다고 한다.[『뇌연집(雷淵集)』 권8] 그들은 서로 모여서 끊임없이 시문(詩文)을 연찬(硏鑽)하였는데, 이천보(李天輔)의 『진암집(晉菴集)』과 오원(吳瑗)의 『월곡집(月谷集)』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남유용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남유용은 서법(書法)에도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남유용의 글씨를 얻으면. 모두 보물처럼 집안에 간수하였으나, 지금 전해지는 유묵(遺墨)이 별로 없다. 다만 비문에 새겨진 남유용의 글씨로는 우화교비(羽化橋碑)와 황해도 관찰사윤세수(尹世綏)의 비문(碑文) 등이 남아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경기 광주(廣州) 석마향(石馬鄕) 율리(栗里)의 언덕에 있는데, 아들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금릉집(金陵集)』 권16] 1779년(정조 3) 12월에 정조가 스승 남유용에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첫째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는 판서(判書)유명홍(兪命弘)의 딸인데, 장남 남공보(南公輔)를 낳았고, 둘째부인 최씨(崔氏)는 사인(士人) 최당(崔禟)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고, 셋째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통덕랑(通德郞)김석태(金錫泰)의 딸인데, 차남 남공철(南公轍)을 낳았다. 장남 남공보(南公輔)는 진사(進士)인데. 일찍 죽었으며, 차남 남공철(南公轍)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냈다. 손자 남인구(南麟耉: 남공보 아들)는 목사(牧使)를 지냈고, 증손자 남주헌(南周獻: 남인구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가암유고(可庵遺稿)』
  • 『가정유고(柯汀遺稿)』
  • 『강한집(江漢集)』
  • 『고서당집(古書堂集)』
  • 『관란유고(觀瀾遺稿)』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귀록집(歸鹿集)』
  • 『금릉집(金陵集)』
  • 『기봉집(碁峯集)』
  • 『기옹집(寄翁集)』
  • 『뇌연집(雷淵集)』
  •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 『단릉유고(丹陵遺稿)』
  • 『도암집(陶菴集)』 『동계유고(東溪遺稿)』
  • 『동계집(東谿集)』 『명고전집(明皐全集)』
  • 『무명자집(無名子集)』
  • 『미호집(渼湖集)』
  • 『보만재집(保晚齋集)』
  • 『석문집(石門集)』
  • 『송암집(松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醇庵集)』
  • 『어계집(漁溪集)』
  • 『연석(燕石)』
  • 『연암집(燕巖集)』
  • 『오천집(梧川集)』
  • 『운석유고(雲石遺稿)』
  • 『운양집(雲養集)』
  • 『월곡집(月谷集)』
  • 『이재집(頤齋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입재집(立齋集)』
  • 『자저(自著)』
  • 『정암집(貞菴集)』
  • 『제헌집(霽軒集)』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죽천집(竹泉集)』
  • 『죽하집(竹下集)』
  • 『증소집(橧巢集)』 『지촌집(芝村集)』 『진명집(震溟集)』 『진암집(晉菴集)』
  • 『창하집(蒼霞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태화자고(太華子稿)』
  •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 『퇴헌유고(退軒遺稿)』
  • 『퇴헌집(退軒集)』
  • 『포암집(圃巖集)』
  • 『풍서집(豐墅集)』 『하서전집(河西全集)』
  • 『하서집(荷棲集)』
  • 『한송재집(寒松齋集)』
  • 『해악집(海嶽集)』
  • 『호곡집(壺谷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회헌집(悔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