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지패(南原之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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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남원성을 중심으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최종 목적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각각 달랐다. 1차 침략이었던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조선의 완전 점령을 목표로 하고 더 나가 명으로 진출하려 했다. 때문에 경상도를 거쳐 바로 한성으로 직행했던 것이다. 반면 2차 침략 시에는 경기·충청·경상·전라 등 조선 4도 할양을 목표로 하였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장기전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반드시 장악해야만 했다. 반대로 조선으로서는 전라도 지역의 안전을 위해서는 남원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이에 남원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과는 방어 준비에 혼선을 빚었던 조명연합군의 참패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뿐 아니라 조선에 원병을 파견했던 명 역시 일본군이 남원 지역을 점령할 경우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도 지역도 붕괴될 것으로 내다봤다. 때문에 일본군의 재침이 있자 제일 먼저 남원에 명군을 파견하였다.

남원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명군의 지휘관은 양원(楊元)이었다. 양원은 1597년(선조 30) 5월 21일 한성을 출발하여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남원에는 산에 위치한 교룡산성(蛟龍山城)과 부성(府城)인 남원성이 있었다. 명군의 지원이 있기 전 조선군은 교룡산성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원은 교룡산성의 무기와 군량을 남원성으로 옮기고 남원성 방어에만 주력하였다. 산성 중심의 방어계획이 양원에 의해 변경된 것이다. 이를 염려한 선조는 산성을 함께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양원은 자신은 호랑이고 일본군은 양에 불과하다며 선조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선조실록』30년 7월 9일).

양원은 남원성의 성벽을 높이고 성 밖에는 해자를 만들었다. 또 성에 대포를 배치하는 등 수비 시설을 강화하였다. 8월 10일에는 교룡산성 안과 남원성 밖에 있는 집을 모두 불태워 일본군이 웅거할 곳을 없애버리는 등 나름대로 일본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발단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한 후 일본군은 좌·우군으로 나뉘어 육지에서 전투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 모리수원(毛利秀元)이 지휘하는 우군은 밀양, 합천을 경유하여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향했고,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거느린 좌군은 진주와 구례를 거쳐 남원 지역으로 접근해 왔다.

1597년 8월 일본군이 남원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양원은 명군 유격장진우충(陳愚衷)과 전라병사이복남(李福男)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이복남과 구례현감이원춘(李元春)은 남원성에 합류했으나 진우충은 남원을 도우려다 전주를 잃을 수 있다며 지원에 응하지 않았다.

경과

일본군의 침략을 맞아 남원성 내에는 명군 3,117명, 조선군 700여 명과 의병 500~600여 명 등 4,300~4,400여 명의 군사가 있었다. 반면 일본군의 수는 56,800여 명으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97년 8월 12일 일본군은 남원성 서쪽과 동북쪽 외곽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튿날인 13일 일본군은 성의 동문과 서문 등 성 외곽을 포위하면서 조총 사격을 가해 왔다. 조명연합군은 화포를 발사하여 일본군을 물리친 뒤 성 외곽 참호 주변에 마름쇠[菱鐵] 등을 매설하고 4대문 밖의 다리를 철거하는 등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8월 14일부터 일본군은 참호를 메우는 등 전투 준비를 하면서, 공격을 가해 왔다. 양원은 적에게 약하게 보이면 불리하다며 1,000여 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양원이 공격해 오자 일본군은 퇴각했다. 하지만 양원은 복병을 만나 급히 성안으로 돌아왔다. 15일에는 산발적인 전투만 이루어졌으며,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양원에게 성을 비울 것을 요구해 왔다.

8월 16일 일본군은 남원성에 총공격을 가해 왔다. 조명연합군은 이미 사기가 꺾여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고,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밤 10시경 남문이 무너지면서 일본군이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동문을 지키던 이신방(李信芳), 남문을 지키던 장표(蔣表), 서문을 지키던 모승선(毛承先) 등은 전사했고, 양원은 소수 병력만을 이끌고 성을 탈출하였다.

조선군은 북문을 지키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이복남, 이원춘, 방어사오응정(吳應鼎),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감관(監官)박기화(朴器和) 등은 끝까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최후의 순간 화약고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틀간 남원성에 머문 일본군은 살인과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지른 후 전주로 이동했다. 일본군이 떠난 후 민간인들이 시체를 동충촌(東忠村) 앞에 매장하였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남원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 수령들은 도망가 버렸다. 전주를 지키던 명의 진우충마저 성을 비우고 도망가 일본군은 전주성을 아무런 저항 없이 점령하였다. 명 역시 남원성 전투에서 패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동일원(董一元)과 진린(陳璘) 등을 급파했고, 군사 역시 원래 80,000명을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143,700명으로 증원하였다. 또 명 조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양원을 사형에 처하고, 그의 시신을 조선에 보내왔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징비록(懲毖錄)』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이형석, 『임진전란사』(중), 신현실사, 1977.
  • 이희환, 「정유재란시 남원성전투에 대하여」, 『전북사학』7, 전북대학교사학회, 2008.
  • 케이넨 저·나이또오 순뽀 교주·신용태 역주, 『임진왜란종군기』, 경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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