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부(南原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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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는데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남원부로 고쳤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남원부가 관할해 오던 1현 10향 10소 4부곡을 남원부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고쳤다. 1455년(세조 1)에 남원부가 남원도(南原道)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 남원은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남원진에 속했다. 1739년(영조 15)과 1844년(헌종 10)에 각각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현감으로 낮추었다가, 1748년(영조 24)과 1853년(철종 4)에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1869년(고종 6)에 광양현에서 일어난 변란에 연루되어 남원부사가 다시 현감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남원부가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에 남원부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개편하였다가 나중에 남원군으로 고쳤다. 1360년(고려 공민왕 9)에 남원부로 승격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전라도의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남원부가 관할해 오던 1현 10향 10소 4부곡이 폐지되어 남원부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현은 거령(居寧)이며, 10향은 보유(寶有)·거리(居利)·덕성(德城)·백파(白波)·수도(守道)·아인(阿仁)·도지(道知)·경도(京徒)·남안(南安)·말아(末阿)이다. 10소는 소화척(所火尺)·신내하(申內河)·두가(豆加)·금성(金城)·용봉(龍峯)·웅음(熊陰)·기어천(岐於淺)·치등보(置等保)·양천(陽川)·흥복(興福)이며, 4부곡은 원천(原川)·금안(金岸)·산동(山洞)·고정(古丁)이다. 이로써 그곳 주민들이 토호(土豪)나 향리(鄕吏)의 사적 지배에서 벗어나 점차 공민화(公民化)되었다. 1413년에 도호부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는 전라도의 경우 1부, 3목, 4도호부, 12군, 37현 즉 현령 6, 현감 31에 관원을 둔다고 규정되었다. 4개 도호부 가운데 하나가 남원부이다. 『대전회통』에서는 그것이 1부, 4목, 7도호부, 13군, 31현 즉 현령 5, 현감 26으로 변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원부에 종3품 부사(府使) 1인과 종5품 판관(判官) 1인, 종6품 교수(敎授)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남원부사는 종3품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다. 남원부사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부사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부사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413년에 남원도호부사로 고쳤으며, 1654년(효종 5)에는 남원부사가 좌영장을 겸하였다. 1708년(숙종 34)에는 좌영이 운봉으로 옮겨져 운봉현감이 영장을 겸하였는데, 이 무렵 운봉에 성을 쌓는 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34년 11월 20일). 남원부는 읍격 승강이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739년이다. 역모를 일으킨 찬규(纘揆)의 성향(姓鄕)이라 하여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키고 현감으로 낮추었다(『영조실록』 15년 9월 23일). 1748년(영조 24)에 원래대로 복구하였는데, 『대동지지』에는 그 시기가 1750년(영조 26)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는 1844년이다. 이때도 역변이 있어서 현으로 낮추었다가, 1853년에 다시 남원부로 복구하였다. 세 번째는 1869년이다. 광양현 변란에 남원에 거주하는 권학여(權鶴汝)가 연루되었다 하여, 남원부사를 현감으로 강등시켰다(『고종실록』 6년 6월 8일).

1455년(세조 1)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 고을을 익(翼)에 분속시켰다. 바다와 인접한 곳은 그 전부터 진(鎭)을 설치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방어하였지만, 내륙의 주현(州縣)에는 아직 진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지에도 거진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남원을 비롯하여 임실·구례·곡성을 전라도 남원도(南原道)의 중익으로 삼았다. 좌익은 진안·운봉·장수로 하였으며, 우익은 순창·옥과·동복으로 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혁파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행정 구역상의 도(道)와 군사 조직 단위인 도가 혼동을 일으켰는데, 이제는 군사 명칭의 도는 사라지고 진만 사용하게 되었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남원도 그중 하나이다. 남원진에는 임실·장수·순창·운봉·옥과·곡성·구례가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충좌위의 중부(中部)에는 전주진관, 좌부(左部)에는 순천진관, 우부(右部)에는 나주진관, 전부(前部)에는 장흥진관과 제주진관, 후부(後部)에는 남원진관의 군사가 편성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1654년에 전국의 군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이때 전라도는 중영 전주·우영 나주·좌영 남원·전영 순천·후영 여산에 5영(營)을 두고 각 군현을 배속시켰다. 『증보문헌비고』에 전라도의 영장(營將)이 5원으로 된 것은 그 때문이다. 5영은 병마절도사를 겸하는 감사와 또 한 명의 절도사 아래 편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남원거진이 전라좌영(全羅左營)으로 바뀌었다. 전라좌영의 속읍은 남원·곡성·장수·창평·옥과·구례·운봉 7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2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287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492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남원현에 화포군(火砲軍) 10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남원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06년(고종 43)에 모든 월경지(越境地)와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가 정리되었는데, 남원군은 15면 232리가 이웃 군으로 옮겨 가서 관할 구역이 전보다 크게 줄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남원지』, 남원지편찬위원회, 1992.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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