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묘(南延君墓)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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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연군묘 |
한글표제 | 남연군묘 |
한자표제 | 南延君墓 |
관련어 | 남은들상여, 오페르트(Oppert, Ernest Jacob),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혜원 |
장소 | 경기도 마전 백자동, 경기도 연천 남송정 |
좌향(坐向) | 간좌곤향(艮坐坤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연군묘(南延君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순조실록』 15년 12월 19일, 『고종실록』 5년 4월 21일, 『고종실록』 5년 4월 23일, 『고종실록』 5년 4월 24일 |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조부 남연군(南延君)이구(李球)의 무덤.
개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이다. 1815년(순조 15)에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넷째 아들인 은신군(恩信君)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이름을 이채중(李采重)에서 이구(李球)로 바꾸고 남연군의 봉작을 받았다(『순조실록』 15년 12월 19일). 1815년에 수원관(守園官), 1821년(순조 21)에 수릉관(守陵官) 등을 지냈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응(李昰應)이다.
1836년(헌종 2) 3월 19일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경기도마전 백자동(柏子洞)에 장사하였다가, 곧바로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으로 옮겨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의 묘에 합장하였다. 1845년(헌종 11)에는 충청도 덕산(德山)의 가야산(伽倻山) 기슭으로 이장했다가, 이듬해 3월 18일에 다시 가야산 중간 기슭의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무덤의 사방 경계를 정하였다. 1989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경위
남연군의 묘를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게 된 경위는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흥선군이하응은 덕산대덕사(大德寺)의 탑이 있는 자리가 큰 길지라는 지관의 말을 믿고, 돈 1만 냥으로 주지를 매수하여 절을 불태우고 승려를 내보냈다. 지관이 정해 준 혈 자리에는 탑이 있었는데, 그 탑을 헐고 나니 터가 모두 암반이었다. 그곳에 관을 묻은 뒤, 나중에 누가 옮길까 두려워 수만 근의 쇠를 녹여 붓고 흙[沙土]으로 덮었다고 한다. 김병학(金炳學)이 쓴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따르면, 1846년(헌종 12)에 묘를 이장하였으므로, 그로부터 17년 후에 흥선군의 차남인 이명복(李命福)이 고종으로 등극하였다.
조성 상황
남연군과 부인 여흥민씨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원형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의 좌측에는 1865년(고종 2) 5월에 세운 묘표가 있다. 묘표는 고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64년(고종 1) 7월에 영의정(領議政)조두순(趙斗淳)이 건의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린 다음에 세운 것이다.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올렸으며, 비신은 오석이고, 방형 대석을 갖추고 있다.
봉분 앞 계체석 아래 중앙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좌우에는 양석(羊石)과 망주석(望柱石)이 1쌍씩 설치되어 있다. 석물이 설치된 앞쪽으로 자연 암반이 노출되어 있다.
묘의 아래쪽 입구에는 1865년 5월에 세운 남연군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의 내용은 당시 좌의정(左議政)이던 김병학이 짓고, 글씨는 남연군의 셋째 아들인 이최응(李最應)이 썼다. 이 신도비명에 남연군묘의 천장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독일인 오페르트(Oppert, Ernest Jacob)는 1866년(고종 3)에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남연군묘를 파헤치고 관을 꺼내, 이를 빌미로 흥선대원군과 협상하려 하였다. 1868년(고종 5) 오페르트는 충청도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인이라 사칭하며, 미국인 젠킨스(Jenkins, F.), 프랑스 선교사 페롱(Feron)과 함께 무장한 선원 100여 명을 이끌고 남연군묘를 파헤쳤으나 결국 실패하여 달아났다(『고종실록』 5년 4월 21일)(『고종실록』 5년 4월 23일)(『고종실록』 5년 4월 24일).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련 사항
남연군묘를 이장할 때, 경기도에서 충청도 가야산까지 관을 운반하는 데 사용한 상여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한다. 이장을 마친 뒤 운구했던 상여를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이것을 충청남도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마을에서 보존해 온 것이다. 이 상여는 일반 상여보다 두꺼운 판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고, 정교한 결구를 보여 주며, 조각 수법이 탁월하다. 1974년에 중요민속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梅泉野錄)』「南延君」「南延君墓碑文」「南延君神道碑銘」
- 서울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소장) 고문서 1 국왕문서·王室文書』,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6.
- 예산군, 『남은들상여 실측조사보고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