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부(南陽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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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남양부를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남양부(南陽府)는 고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監務)가 설치된 이후,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지익주사(知益州事),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 익주목(益州牧) 등으로 차례로 승격되었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여러 목을 폐지할 때 남양으로 이름을 고치고 부(府)로 강등시켰다. 남양부는 조선이 건국한 후 한양 천도와 함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1394년(태조 3) 경기우도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을 개정할 때 도호부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남양부는 고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으나,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남양으로 이름을 고치고 부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 13)에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을 개정할 때 도호부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3년(효종 4)에 부로 복구되었고, 1665년(현종 6)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74년(현종 15)에 다시 부로 복구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의 주에는 방어사가 파견되는 방어주(防禦州)와, 지주사(知州事)가 파견되는 지주부군(知州府郡)이 있었다. 지사는 설치 군현의 읍호에 따라 지주사, 지부사(知府事), 지군사(知郡事) 등으로 불렸다. 지주사가 파견되는 지주부군에는 5품 이상의 지주사 아래에 6품 이상의 부사(副使)와 7품의 판관, 8품 이상의 법조(法曹) 등이 있었다. 도호부와 목에는 3품 이상의 사(使), 4품 이상의 부사, 6품 이상의 판관, 7품 이상의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 8품 이상의 법조(法曹), 9품 이상의 의사(醫師)·문사(文師) 등이 있었다. 이들 관원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하였는데, 1116년(고려 예종 11)에는 대도호부와 목의 판관을 고쳐 통판(通判)이라 하였고, 뒤에는 사·판관·사록만을 두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목과 도호부의 지관(知官)인 사·부사는 모두 경관(京官)을 겸직하지 않게 하였다. 1375년(고려 우왕 1)에 목과 도호부의 지관은 모두 병마사를 겸임시켰다. 부사는 도호부사를 보좌하고 도호부사 부재 시 그 임무를 대신하였다. 판관은 군현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부서 간 업무를 원활하게 조절, 통제하면서 수령에게 보고하는 실질적인 2인자였다. 사록의 업무는 군사는 물론 조세·사역·향리 통제·속읍 순찰 등이었다. 장서기는 표문·하표(賀表) 등을 작성하고, 아울러 군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업무 기록을 작성하였는데, 목과 도호부에서는 사록겸참군사가 겸직하였다. 법조는 재판과 관련된 실무와 법률자문을 하는 조선시대의 검률(檢律)에 해당하는 직책이었고, 의사와 문사는 질병 구제와 교육을 전담하는 속관이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조선전기의 지방행정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남양부에는 종3품의 부사(府使)와 종6품의 교수(敎授) 각 1명이 있었다. 교수는 지방 향교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부와 목에 두었으나, 무록관(無祿官)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에서 자치규약인 향약 등이 활발하게 운영됨으로써 조선후기에는 모두 폐지시켰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에 담긴 남양부의 조직구성은 3품의 부사 아래 좌수 1명, 별감 3명을 두었고, 군관·아전 등은 정해진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부에는 4·5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남양부는 당성군(唐城郡)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수원인 수주(水州)에 속했다가 뒤에 지금의 인천인 인주(仁州)로 옮겨 소속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1290년(고려 충렬왕 16)에 남양부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 우승(右丞)이 된 관계로 이곳 수령을 지익주사로 승격시키고, 뒤에 다시 강녕도호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익주목으로 승격시켰다.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여러 목을 폐지할 때 비로소 남양으로 이름을 고치고 부로 강등시켰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지방행정구역의 명칭을 개정할 때 도호부로 바뀌었다. 1644년(인조 22)에 역적 정형(鄭衡)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 후인 1653년(효종 4)에 다시 부로 복구되었다. 1665년(현종 6)에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고, 1674년(현종 15)에 현으로 강등된 지 10년이 지났으므로 다시 부로 복구시켰다. 1871년(고종 8)에 대부도를 남양부에 소속시켰다(『고종실록』 8년 7월 20일). 1885년(고종 22)에 남양부사가 남양진병마첨절제사(南陽鎭兵馬僉節制使)친군우영전영장토포사(親軍右營前營將討捕使)를 겸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남양(京畿道南陽)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