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문(南小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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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성곽의 동남쪽에 설치한 소문.

개설

조선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최초로 성곽을 조성할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사대문으로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설치했다. 사소문의 경우 동북은 홍화문(弘化門), 동남은 광희문(光熙門), 서남은 소덕문(昭德門), 서북은 창의문(彰義門)이라고 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후에 홍화문은 혜화문이 되었고, 소덕문은 소의문이 되었다.

한양의 남쪽에는 목멱산이라는 매우 높은 안산(案山)이 가로막고 있다. 이 때문에 정남문으로 설치한 숭례문은 정남에 위치하지 못하고 서쪽에 치우치게 만들어졌다. 또 동남쪽에 설치한 광희문은 정동문인 흥인문과 가깝게 위치시켜서 동남쪽 소문이라기보다 동소문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런 까닭에 한양 남쪽에서 한양으로 출입하고자 하는 경우 매우 먼 거리를 돌아 광희문을 통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한양 성곽 남쪽을 출입할 수 있는 소문을 새롭게 만들자는 의견이 제시됐고, 1456년(세조 2)경에 남산 동쪽에 남소문을 설치했다.

내용

『조선왕조실록』에서 남소문이 등장하는 것은 1456년(세조 2)이다. 왕이 직접 청학동(靑鶴洞)에 거둥해서 남소문을 만들 자리를 살피고 문 설치의 적합성 여부를 점검하는 내용에 나온다. 어떤 자가 “벌아현(伐兒峴) 길이 험하기 때문에 한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많이 다치니, 만일 남산 동쪽에 새로 문을 설치하면 왕래에 편리합니다.”고 하여 이곳에 새로운 문을 설치하기로 했다(『세조실록』 2년 11월 20일). 벌아현은 오늘날 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칭하는데 이쪽 길이 너무 험하기 때문에 남산 동쪽에 성문과 새로운 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후 『세조실록』에서 남소문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아 남소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른 한양의 성문과 마찬가지로 남소문을 건국 초에 설치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소문만 후대에 새로 설치한 것이어서 호사가들의 언급이 끊이지 않았다. 1469년(예종 1) 8월 25일에 남소문 밖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강도들이 한양에 번을 서기 위해 올라온 군사[甲士]들에게 활을 쏴 위협하며 보따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남소문을 지키던 선전관(宣傳官)에게 칼을 휘둘렀다. 단순한 강도 사건이었지만 이 때문에 남소문 폐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문이 만들어진 지 10여 년 만의 일이었다. 남소문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은 주로 음양설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처음 남소문을 만들 때 이미 남소문의 방향이 흉하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소문은 한양의 손(巽), 즉 동남쪽 방향에 위치하는데 이 방향은 음양가들 사이에서 매우 꺼리는 방향이므로 문을 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기 때문에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다는 말도 나온다(『예종실록』 1년 9월 14일).

또 다른 음양설을 들고 나온 이도 있었다. 남소문은 정남인 정오(正午) 방향이기 때문에 예종의 생년(生年)과 겹쳐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예종실록』 9월 14일 3번째기사]. 예종은 1450년생인데 경오(庚午)년에 해당한다. 오(午)가 겹치기 때문에 음양설에서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방향에 위치하지만 음양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손 방향으로 파악했고 또 다른 사람은 오 방향으로 파악하였다. 결국 이런 음양설에 따라서 남소문은 폐문됐다.

이후 여러 이유를 들어 남소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적으로 제기됐다. 1553년(명종 8)에는 남소문 밖에 도둑들이 들끓기 때문에 다시 남소문을 열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하지만 예종 때 남소문을 폐문했던 까닭을 살펴본 후에 실현되지 못했다(『명종실록』 8년 4월 16일). 시간이 한참 지나 1675년(숙종 1)에 다시 남소문을 설치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음양설을 들어 남소문을 열자는 의견이었다. 술사(術士) 김진발(金震發)이 남소문이 닫혀 있어 인재(人才)가 나지 않기 때문에 남소문을 열자고 했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4년 후인 1679년(숙종 5)의 논의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남소문이 위치한 방위는 소양(少陽)에 해당하는데 이곳을 닫아 두었기 때문에 왕손 중에 여자만 많고 남자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남소문을 다시 열어 소양의 기운을 받는다면 국가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병조(兵曹) 판서(判書)김석주(金錫冑)가 “소양의 방위는 정동(正東)에 있고, 또 동남방은 손 방향이지 진(震: 8궤의 동쪽) 방향이 아니다.”고 하며 남소문 열기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승정원일기』 1679년 6월 23일자 기록에 따르면 남소문 축성이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석주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남소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1690년(숙종 16)에도 남소문을 열자는 주장이 있었다. 남소문이 경복궁에서는 손방·사방이 되나, 시어소(時御所), 즉 창덕궁에서는 병방(丙方)·정방(丁方)이기 때문에 양명한 쪽이 닫혀 막히니 다시 문을 열자는 것이었다. 『승정원일기』 1690년(숙종 16) 8월 10일자 기록에 따르면 지관을 보내 방향을 측정했더니 남소문은 창덕궁의 병방에 해당했다. 하지만 병방 역시 음양가들이 소위 말하는 삼화방(三火方)에 해당하므로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같은 날 『숙종실록』에는 남소문을 열자고 하는 자들은 모두 남인(南人)들로 남소문을 열면 남인이 번창한다는 얘기가 있어 열고자 했던 것이라는 사관의 평이 기록되었다.

『승정원일기』 1725년(영조 1) 1월 11일자에는 경기도 선비인 안탈(安梲)이 남소문을 열어야 한다고 상소한 일이 기록되었다. 한양에서 남소문이 위치한 동쪽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고 오히려 한양 서쪽이 크게 번창하니 균형이 맞지 않으므로 남소문을 열어 경제적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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