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복흥(南復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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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졸년 미상.] 조선 전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평양 서윤(平壤庶尹)이다. 자(字)는 기부(起夫)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수의 부위(修義副尉)남맹하(南孟夏)이고, 어머니 정씨(鄭氏)는 정승휴(鄭承休)의 딸이다. 한성부 판윤(判尹)남효의(南孝義: 생육신 남효온의 동생)의 증손자이고, 통례원 통례(通禮)남경춘(南慶春)의 손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사마방목>]

1579년(선조 12)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문과방목>]

1592년(선조 25) 평양 서윤(平壤庶尹)이 되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왜군이 평양성을 함락하자, 평양 서윤남복흥이 흩어져 달아나는 병사 수천 명을 모아서 군사를 재정비하여 대보산(大寶山) 서쪽에 진을 치고 왜군들이 대동강 서쪽으로 침범하여 북상하지 못하도록 방비하였다.

1593년(선조 26) 평양 서윤남복흥은 군사를 이끌고 중국 명(明)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비변사에서 평양 서윤남복흥에게 포상하도록 청하자, 선조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升品)하게 하였다. 같은 해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강릉부사남복흥을 청렴하지 못하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 북군(北軍)과 남군(南軍)을 대규모로 파견하였는데, 1598년(선조 31) 남복흥은 명나라 수군(水軍) 제독(提督) 진린(陳隣)의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수군을 전라도로 안내하며, 군량미를 공급하는 일을 주선하여,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이순신(李舜臣)의 수군과 연합하여 왜군의 전함과 싸워서, 한산도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

1599년(선조 32) 사간원 사간(司諫)남근(南瑾)이 아뢰기를, “남복흥이 중국 장수를 수행하여 먼 길을 왕래하면서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만 하였을 뿐이고 아무런 특기할 만한 공로가 없습니다.”하고, 남복흥에게 가자(加資)한 것을 취소하도록 청하니, 선조가 말하기를, “그 일을 계속할 사람이 없을 텐데⋯.”하고, 윤허하지 않았다.[『선조실록』 32년 2월 15일 2번째기사]

성품과 일화

성품이 무관(武官)처럼 거칠고 용맹스러워서 평양성을 탈환할 때 전공(戰功)을 세웠다. 남복흥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을 때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남복흥의 성품이 거칠고 술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탄핵하여 마침내 파직되었다.[『선조실록』 26년 10월 18일 1번째기사]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복흥은 명나라 수군(水軍) 제독(提督) 진린(陳隣)의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었다. 제독 진린의 배를 타고 명나라 수군을 안내하여 해안선을 따라서 전라도로 내려갔다. 중국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는 일은 끝이 없었고, 시일이 지날수록 사사건건 명나라 군사들의 요구에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고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등 모든 일을 전라도 연안 고을에서 미리 준비하게 하고, 그 접대와 공급을 주선하였다. 명나라 군사들의 환심을 잃지 않아야 우리 군사와 함께 서로 협력하여 왜적과 싸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고 쉬운 것을 막론하고 모든 일을 하는 데에 명나라 장수들의 독촉이 성화같았다. 심지어 위기를 당하여 대처할 때에도 명나라 장수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남복흥과 상의하지 않았다. 전공을 세울 만한 일에는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잘못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번번이 우리 군사들에게 책임을 돌리었다. 제독 진린은 말하기를,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서 수군(水軍)을 총령(總領)하므로, 주사(舟師: 수군)와 변장(邊將)들을 모두 지휘[節制]해야 한다. 조선의 배신(陪臣)들 중에서 나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일체 군법으로 다스리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접반사(接伴使) 남복흥(南復興)이 비변사에 보고하기를, “진린 제독이 우리나라의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싸우고 싶어 합니다.” 하였다. 비변사에서 선조에게 아뢰기를, “만약 그 말대로 한다면 일은 더욱 어렵게 되어 통제사(統制使) 이하 수사(水使)들은 모두 자기 군사가 없는 장수로 전락되고 말 것이므로, 신들은 몹시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렵다고 거절하고 싶으나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하니, 선조가 제독 진린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본국의 수군은 적에게 패배한 나머지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고, 그 사이에 기계(器械)와 선척(船隻)도 힘이 모자라서 많이 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졸들은 모두 해변의 어민들과 민가의 백성들인데,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대인의 작전에 따라 지휘하는 데에 일일이 제때 따르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경상도 우수사(右水使)이순신(李純信), 전라도 우수사(右水使)안위(安衛), 충청도 수사(水使)오응태(吳應台) 등에게 각각 부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소속 병사들을 정돈하게 하여, 모든 군기(軍機)와 대사(大事)를 대인의 분부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선조실록』 31년 6월 27일 2번째기사] 그러나 노량과 한산도 해전에서 통제사이순신이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왜군에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남복흥이 주선하여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을 상호 협력하게 만든 결과였다.

후손

부인 박씨(朴氏)는 박귀원(朴貴元)의 딸이다. 아들 남일(南鎰)은 진사(進士)로서 영평현감(永平縣監)을 지냈다. 손자 남득형(南得衡)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율곡전서(栗谷全書)』
  • 『지봉집(芝峯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