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몽뢰(南夢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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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 12)∼1681년(숙종 7) = 62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병조의 정랑(正郞), 선산부사(善山府使)이다. 자(字)는 중준(仲遵)이고, 호(號)는 이계(伊溪)이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의성(義城) 신촌리(新村里)이다.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남해준(南海準)이고,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군자감 직장(直長)권지(權誌)의 딸이다.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남천한(南天漢)⋅김방걸(金邦杰)⋅유정휘(柳挺輝)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남인의 중진으로서 현종⋅숙종 때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 윤선도(尹善道)⋅허목(許穆) 등을 지지하고, 서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반대하다가, 큰 수난을 겪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42년(인조 20)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사마방목>]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51년(효종 2)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문과방목>]

1652년(효종 3) 성균관 권지(權知)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에 봉상시 부봉사(副奉事)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도 청주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이 되었다.

1653년(효종 4) 종4품상 조산대부(朝散大夫)를 거쳐, 정4품하 봉열대부(奉列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의성으로 돌아와서, 윤곡촌(尹谷村)의 이계(伊溪)에 서당(書堂)을 짓고, 이름을 이계당(伊溪堂)이라 붙이고, 스스로 호(號)를 이계(伊溪)라고 불렀다.

1654년(효종 5)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고,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1655년(효종 6) 동인(東人)의 중진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에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갈등을 빚어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의성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남해준(南海準)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단군부터 조선 건국까지의 역사를 개괄한 『동국소승(東國小乘)』을 지었다.

1656년(효종 7) 형조 좌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임실현감(任實縣監)이 되었으나, 그해 겨울에 서인 출신의 어사(御史)가 현감남몽뢰의 치적을 나쁘다고 보고하여 파직되었다.

1657년(효종 8) 전라도 감사가 현감남몽뢰를 변호하여 임실 현감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때 전라도에 기근(饑饉)이 크게 들자, 임실 현감남몽뢰가 진휼(賑恤)을 잘 하여 임실 고을에서는 굶어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659년(효종 10)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났다. 서인 송시열⋅송준길 등은 기년복(朞年服: 1년 상복)을 주장하고,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 등은 삼년복(三年服: 3년 상복)을 주장하였는데, 부사과 남몽뢰는 남인의 윤휴⋅윤선도를 지지하고 서인의 송시열⋅송준길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영의정정태화(鄭太和)가 송시열의 기년복을 지지하여, 서인의 기년복이 채용되고 남인의 영수 윤선도는 유배되었다.

현종 시대 활동

1660년(현종 1)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남몽뢰는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의성으로 돌아왔다. 남몽뢰는 다시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서, 옛날 스승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을 찾아가서 경전(經典)을 읽고 학문을 토론하였다.

1661년(현종 2) 다시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정권을 잡은 서인과 충돌하여, 경상도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효종실록(孝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또 왕명을 받고 동지사(冬至使)의 명나라 황제에게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지었다. 그 뒤에 남몽뢰는 서인의 정권 아래 고개를 숙이고 벼슬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벼슬길에서 물러나서 몇 년 동안 고향 의성에서 은거하며, 스승 김시온(金是榲)을 모시고 옛날 친구들과 어울려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때 남몽뢰는 고성(固城)과 임실(任實)의 현감(縣監)을 역임하면서 겪은 경험에 의하여 후배 수령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거관불망기(居官不忘記)』를 지었는데, 고을의 수령으로서 간사한 아전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등 33가지 일을 열거하고 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666년(현종 7) 호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1667년(현종 8) 예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말에 부친상을 당하여, 두 동생들과 함께 3년 동안 의성의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670년(현종 11) 상례(喪禮)를 끝마치고, 병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1671년(현종 12) 충좌위(忠佐衛) 사정(司正)이 되었다가, 병조 정랑(正郎)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경상도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다.

1674년(현종 15) 외직으로 나가서 경상도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는데, 이때 효종의 왕비가 돌아가자,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갑인예송(甲寅亥禮訟)>이 일어났다. 그때 진주목사남몽뢰는 <기해예송> 때에 남인 윤선도와 윤휴의 입장을 밝힌 「기해예송시말(己亥禮訟始末)」을 지어서 현종에게 바쳤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罷職)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9년(숙종 5) 통례원 우통례(右通禮)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경상도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

1680년(숙종 7)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이 죽음을 당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때 선산 부사남몽뢰도 조세(租稅)로 거둔 곡물과 포목을 착복하고 왜인들과 밀무역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남몽뢰는 의금부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으나,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음에도 서인들이 남몽뢰를 싫어했기 때문에 숙종이 특별히 명하여, 전라도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다.

1681년(숙종 7) 남몽뢰를 선산부사로 천거한 천주(薦主) 한성부 판윤(判尹)이관징(李觀徵)도 파면되었다.[『숙종실록』 7년 8월 19일 1번째기사] 이때 영의정김수항(金壽恒) 등이 남몽뢰를 다시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남몽뢰는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의금부 도사가 남몽뢰를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그해 11월 15일 밤에 남몽뢰는 전라도 남원(南原)의 객사(客舍)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돌아갔는데, 향년이 62세였다.[행장]

1689년(숙종 15) 맏손자 남윤주(南胤胄)가 숙종에게 조부 남몽뢰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니, 숙종이 신원(伸寃)을 허락하여, 죽은 남몽뢰는 마침내 복관(復官)되었다. 1820년(순조 20) 증손자 남성천(南聖天)과 현손자 남상의(南象毅)가 남몽뢰의 유고(遺稿)를 모아서 『이계집(伊溪集)』 원집을 편찬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또 1937년 10세손 남우룡(南佑龍)과 남규우(南圭佑) 등이 원집에서 빠진 남몽뢰의 글을 모아서 『이계집(伊溪集)』 속집을 편찬하여 원집과 함께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남몽뢰는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외지에 있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으므로, 이름에 ‘꿈 몽(夢) 자’를 넣어서 ‘남몽뢰(南夢賚)’라고 지었다. 태어나면서 총명하여 5, 6세 때에 이미 속문(屬文: 글을 짓는 것)에 능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간혹 과음(過飮)하였는데, 어머니가 크게 꾸짖은 다음부터는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더라도 절대로 취하지 않았다. 나이 18세 때에 아주신씨(鵝洲申氏)신지의(申之義)의 딸과 혼인하였다. 나이 19세 때 어머니 권씨가 돌아가자, 두 동생과 함께 선영(先塋)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나이 21세 때 탈상(脫喪)하자, 의성에 살던 표온(瓢隱) 김시온(金是榲)을 찾아가서 수학하였는데, 김시온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맏형 김극일(金克一)의 맏손자이고, 그의 후처(後妻)는 영양남씨(英陽南氏)였다.

1641년(인조 19)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1642년(인조 20) 나이 23세 때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다. 이때 생원과에 같이 합격한 사람끼리 동방회(同榜會)를 조직하였는데, 남몽뢰⋅김치정(金致精)⋅이명원(李明遠)⋅송정렴(宋挺濂)⋅박여필(朴汝弼) 등이 서로 도우며 함께 활동하였다.[『존양재집(存養齋集)』 권3]

1644년(인조 22)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는데, 성균관의 유생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남몽뢰를 따르고 교유하였다. 이때 서상(西庠: 서쪽 기숙사)의 진사(進士) 한 사람이 성대하게 주안상(酒案床)을 마련하여 남몽뢰를 대접하며 은근히 남몽뢰의 취향(趨向)을 물어보았다. 서인 명문 집안 출신의 진사가 동인 집안 출신의 남몽뢰에게 그의 학문과 성품을 한번 알아보고자 하였다. 이때 남몽뢰가 대답하기를, “나는 영남(嶺南) 사람이다. 나는 영남에서 자랐으므로, 나는 장차 영남 사림(士林)을 위해서 죽을 것이다.”하니, 그 서인 출신의 진사(進士)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물러갔다. 그때 사림(士林)에서 이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행장] 1651년(효종 2)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갈등을 빚어서 수난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 의금부 도사(都事)가 남몽뢰를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그해 11월 15일에 전라도 남원(南原)의 객사(客舍)에 이르렀는데, 남원부사(南原府使)조위수(趙渭叟)가 술을 가지고 객사로 찾아와서 남몽뢰를 위로하였다. 밤이 깊도록 남몽뢰는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사조수위에게 말하기를, “부사가 먼저 가셔야 내가 좀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남원부사조수위를 돌려보냈는데, 조수위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5세손이었다. 또 남몽뢰는 의금부 도사(都事)와 나졸들에게도 말하기를,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할 테니, 그대들도 물러가서 자도록 하라.”하고, 사람들과 종들을 물리치고 의관(衣冠)을 갖추고 침실로 들어갔다.이튿날 아침에 종들이 침실에서 목을 매어 자결한 남몽뢰를 발견하였다. 남원부사조위수가 달려와서 통곡하고, 남몽뢰의 시신을 거두어 염습하여 주었다. 남몽뢰의 옷속에서 아들 남명하(南明夏)에게 남긴 글이 있었는데, 유서에서 말하기를, “너는 과거를 보지 말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나를 위해 만사(輓詞)를 청하지도 말아라.” 하였다. 또 상자 속에서 스스로 지은 자기 비명(碑銘)이 있었는데, 비명에서 이르기를, “스스로 호(號)를 이계(伊溪)라고 부르며, 훌륭한 유자(儒者)가 되기를 흠모하였으나, 성품이 어찌나 옹졸하였든지, 뜻을 이루려는 행동에는 얼마나 나태(懶怠)하였던가.”하고, 평상시에 뜻을 위해서 행동하지 못한 이쉬움을 대략 서술하였는데, 옥중에 있을 때 지은 글이었다.[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의성(義城) 금당산(金堂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또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가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고, 7세손 남만회(南萬會)가 쓴 유사(遺事)도 있다.[『이계집(耳溪集)』 권3 부록]

부인 아주신씨(鵝洲申氏)는 신지의(申之義)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남명하(南明夏)이고, 딸은 사인(士人) 신두석(申斗錫)의 처이다. 손자는 남윤주(南胤胄)인데, 남몽뢰가 죽은 지 8년이 지나서, 서인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남윤주가 숙종에게 조부 남몽뢰의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하니, 숙종이 신원(伸寃)을 허락하여, 죽은 남몽뢰는 마침내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경암집(敬菴集)』
  • 『교남지(嶠南誌)』
  • 『금대시문초(錦帶詩文鈔)』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산택재집(山澤齋集)』
  • 『이계집(伊溪集)』
  • 『재향지(梓鄕誌)』
  • 『정와집(訂窩集)』
  • 『존양재집(存養齋集)』
  • 『표은집(瓢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