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하(南德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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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덕하 |
한글표제 | 남덕하 |
한자표제 | 南德夏 |
분야 | 인물 |
유형 | 무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영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여화(汝和)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88년(숙종 14) |
사망 | 1742년(영조 18) |
본관 | 의령(宜寧) |
주거지 | 서울[京] |
묘소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
증조부 | 남유경(南有慶) |
조부 | 남두명(南斗明) |
부 | 남연년(南延年); 청주영장(淸州營將), 이산군수(理山郡守),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순절, 충장공(忠壯公) |
모_외조 | 양씨(楊氏); 군수(郡守) 양우한(楊遇漢)의 딸 |
형제 | (형) 남덕유(南德維) (서제) 남덕장(南德章) |
처_장인 | 조씨(曹氏); 절도사(節道使) 조국상(曹國相)의 딸 |
자녀 | (1자) 남정오(南正五); 남병영(南兵營)의 훈도(訓都) (2자) 남서오(南瑞五); 무과 급제, 방어사(防禦使) (1녀) 진주목사(晉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덕하(南德夏) |
총론
[1688년(숙종 14)∼1742(영조 18) = 55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무신. 행직(行職)은 북병사(北兵使)⋅경상 우병사(右兵使)이다. 자(字)는 여화(汝和)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청주영장(淸州營將)남연년(南延年)이고, 어머니 양씨(楊氏)는 군수(郡守)양우한(楊遇漢)의 딸이다.
숙종 시대 활동
1712년(숙종 38)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무과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영조 시대 활동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아버지 남연년(南延年)이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있다가 청주성이 반군에게 함락되자, 반군에게 붙잡혀서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천부사(伊川府使)남덕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청하여 종군하였다. 남덕하는 ‘복수장(復讐將)’이라고 일컸고, 경기 안성⋅죽산 일대에서 이인좌의 반군과 싸워서 이인좌를 체포하였다.
1731년(영조 7) 황해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비변사 당상관(堂上官) 장신(將臣) 이삼(李森)에게 하직 인사를 하지 않고 바로 임지로 떠났다. 이때 백일헌(白日軒) 이삼(李森)은 소론(少論)으로서 이인좌의 일당이라고 배척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백일헌유집(白日軒遺集)』 권2]
1732년(영조 8) 남상하는 어머니 양씨(楊氏)의 상을 당하여 선산(先山)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734년(영조 10) 모친상을 끝마친 뒤에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陞品)되고 금군장(禁軍將)에 임명되어, 궁궐을 호위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일에 비변사의 장신(將臣) 이삼에게 하직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당하고,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1738년(영조 14)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고, 1739년(영조 15) 경상 우병사남덕하는 진주(晉州) 의암(義巖)에 기생 논개(論介)의 애국 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논개는 임진왜란 때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한 기생이다.
1741년(영조 1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북병사(北兵使)가 되어,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최전방 지역을 방어하는 총책임을 맡았다.
1742년(영조 18) 북병영(北兵營)에서 과로로 쓰러져서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55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용감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727년(영조 3) 이천 부사(伊川府使)남덕하는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있던 아버지 남연년(南延年)이 병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감사에게 정장(呈狀)하여 말미를 청하고 회제(回題: 회답 결재)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떠났기 때문에 강원도 감사가 남덕하를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영조가 용서하였다. 1728년(영조 4) 청주에서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영조의 즉위에 반대하던 소론이 노론의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청주영장(淸州營將)남연년은 병중에 있다가 반군에게 붙잡혀서 이인좌에게 끌려갔으나, 이인좌를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이천부사남덕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한필(李漢弼: 이봉상의 아들)과 함께 종군하기를 자원하였다. 이에 영의정이광좌(李光佐)가 건의하기를, "남덕하와 이한필을 승품(陞品)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도록 하소서." 하니, 영조가 이를 윤허하였다.[『영조실록』 4년 3월 20일 3번째기사]
이인좌는 3남 지방의 소론 세력과 연대하지 않고 홀로 서울로 진격하다가, 안성 장항령(獐項嶺)과 죽산(竹山) 일대에서 관군에게 패배하여 체포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처형됐다. 1730년(영조 6) 영조가 남덕하를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하여 큰 절의(節義)를 세웠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고 있다.”하고, 남덕하에게 초모(貂帽: 담비털로 만든 모자) 하나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1732년(영조 8) 남상하가 어머니 양씨(氏)의 상을 당하여, 초상(初喪) 장례를 치를 때 영조가 예관(禮官)을 보내어 충신 남연년의 아내 양씨를 염습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였는데, 영의정홍치중(洪致中)의 건의를 따른 것이다. 그 뒤에 영조는 남연년에게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고 내려주었다. 남연년은 시문(詩文)에 매우 뛰어났는데, 그 후손들이 그 시문을 모아서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를 출간하였다.
1738년(영조 14) 남상하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나가서, 1739년(영조 15) 경상 우병사남덕하는 진주 의암에다 기생 논개의 애국 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건립하고, <의암 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다. <의암 사적비>는 지금 진주시 본성동(本城洞)에 있는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제1차 진주(晉州) 대첩(大捷)에서 왜군들이 김시민(金時敏)에게 대패하였으나, 1593년(선조 26) 명나라와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으로 왜군들이 철수하면서 진주성(晉州城)을 총공격하여 제2차 진주 싸움이 벌어져서, 진주성 안에 있던 7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옥쇄(玉碎)하였다. 그 뒤에 기생 논개가 진주 사람들의 복수를 하려고 의암의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南江)에 뛰어들어 순절(殉節)하였다.
그 뒤에 1722년(경종 2) 경상우도 병마사최진한(崔鎭漢: 1652~1740)이 진주 사람들의 진정에 따라서 경종에게 이를 장계(狀啓)하자, 경종이 <의암 사적비>를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진주 선비 명암(明庵) 정식(鄭栻)이 논개의 절의(節義)를 기리는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경종이 돌아가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무신(戊申) 반란>과 <이인좌의 난>을 겪으면서 사적비와 비각(碑閣)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였다. 1739년(영조 15) 경상우도 병마사남덕하가 영조에게 이를 계청(啓請)하자, 1740년(영조 16) 영조가 “사당을 세우고 그 후손을 포상하라.”고 하였다. 1741년(영조 17) 경상 우병사남덕하가 영조의 뜻을 받들어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논개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전 우병사최진한이 세운 <의암 사적비>에다 ‘의기 논개의 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비각을 세웠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로 된 건물인데, 비각에 걸려 있는 현판에 ‘의기 논개지문’이라는 글씨는 우병사남덕하가 직접 쓴 것이다. 우병사남덕하가 논개의 후손을 포상하려고 찾았으나 논개의 후손은 없었다. 이에 논개가 순절한 지 147년 만에 우병사남덕하가 그 사당을 세워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진주 사람들이 의기사에 모여서 논개에게 제향하고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에 있다.
부인 조씨(曹氏)는 절도사(節道使)조국상(曹國相)의 딸이다. 장남 남정오(南正五)는 남병영(南兵營)의 훈도(訓都)를 지냈고, 차남 남서오(南瑞五)는 무과에 급제하여,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딸은 진주목사(晉州牧使)정재원(丁載遠: 정약용의 아버지)의 첫째부인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정재원의 둘째부인 윤씨(尹氏)가 낳았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무과방목(武科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
- 『백일헌유집(白日軒遺集)』
- 『학당유고(鶴塘遺稿)』
- 『해은유고(海隱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