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역(南大門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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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7월 8일 영업을 개시한 철도역으로, 현재 서울역의 전신.

개설

1900년(고종 37) 7월 8일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그 전해에 완공된 경인철도가 서울 시내와 연결되었다. 경인철도가 완전 개통된 것이다. 이때 서울의 출발점이 남대문정거장, 즉 남대문역(南大門驛)이었다. 최초의 남대문역은 오늘날의 염천교 부근에 임시 가건물 형태로 지은 2층 목조 건물이었다. 1922년 12월 29일자로 남대문역은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성역 개축 공사는 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지연되어 예정보다 1년 늦은 1925년 9월 30일 공사를 마치고 10월 12일 개업하였다. 현재의 서울역 철도박물관이다.

내용 및 특징

1907년 10월 20일 순종은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일본 황태자(다이쇼 천황)를 남대문정거장까지 배웅하고, 황태자(영친왕)도 남대문정거장을 통해 인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일본 황태자를 배웅했다(『순종실록』 즉위년 10월 20일). 1909년 1월 7일에는 순종의 남행이 있었는데, 이때도 역시 남대문정거장을 이용했다(『순종실록』 2년 1월 7일). 여기서 이야기하는 남대문정거장이 곧 남대문역이다.

    1. 그림1_00017192_남대문역 건립 예정지 약도(1899년 8월 28일)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가 제물포-노량진 구간으로 완공되었다. 1900년 7월 8일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서울 시내와 경인철도가 연결되었고, 그해 11월 12일에 경인철도 완전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서울의 출발점이 남대문정거장, 즉 남대문역이었다. 1899년 8월 28일 하야시[林權助]공사가 박제순외무대신에게 보낸 공문에 의하면, 경부철도의 남대문정거장과 기타 부속 창고 및 공장은 <그림1>의 점선 안에 건설될 예정이었다. 1900년 4월에 한성판윤과 일본인 사이에 남대문정거장 용지 대여 협약이 체결되었고, 공사에 착수하여 그해 7월 8일에 영업을 개시했다. 남대문정거장은 오늘날의 염천교 부근에 있었는데, 임시 가건물 형태로 지은 2층 목조 건물이었다. 46평짜리 역사에 대합실과 역무 공간, 수화물 취급소, 찻집 등이 들어 있었다.

변천

남대문역을 경성역으로, 남대문전신취급소를 경성전신취급소로 개칭한다는 내용의 총독부 고시가 1922년 12월 29일자로 공포되었다. 1923년 1월 1일부터 남대문역은 경성역으로 불리게 되었다(<그림2> 참조). 1922년 6월 1일에 기공된 경성역 개축 공사는 1925년 9월 30일 공사를 마치고 그해 10월 12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오늘날 서울역 철도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총 3년 3개월에 걸친 공사였는데, 원래 1924년 8월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이처럼 당초 예정보다 1년 이상 늦어진 것은 1923년 도쿄대지진의 영향으로 공사 재료인 콘크리트나 철근 같은 건축 재료를 제대로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사비 또한 최초 책정된 약 420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약 195만원이었다. 경성역은 도쿄제국대학 건축과 교수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가 설계했고, 시공은 1914년 준공한 조선호텔을 시공했던 합자회사 시미즈구미[淸水組]가 맡았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호평 받고 있던 교토역을 참고해서 지었다고 한다.

    1. 그림2_00017192_경성역으로 이름 바뀐 남대문역(동아일보 1923.01.01)

『매일신보』 1913년 8월 7일자에 의하면, 1913년 7월 중 남대문역의 이용객은 타는 승객이 32,527명이었고, 내리는 강객이 32,983명, 그리고 입장권을 구입한 인원이 19,912명이었다. 1922년 10월 중 이용객은 타는 사람이 105,411명이었고, 내리는 사람은 109,822명, 그리고 입장권 이용자는 4월부터 10월까지 201,538명으로 하루 평균 960명이었다. 1928년 말 당시 1년 평균 150여만명이 경성역을 통해 서울을 빠져나갔고 130여만명이 경성역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경성역의 이용자 수는 계속 증가했다. 1934년에는 1년 동안 376만명이 경성역을 이용했다. 경성역의 1년 평균 수입 또한 510만원에 달했다.

1935년 4월 20일에는 경복궁에서 조선산업박람회가 열렸을 때는, 매일 30,000명 이상 경성역을 드나들었다. 그해 승객은 400만명을 초과하고, 역의 수입도 600만원 이상 거둘 것으로 점쳐졌다. 1930년대 말 전시기에 접어들면서 경성역의 성장이 정체했다. 1938년 5월 당시, 경성역의 하루 승강자 수는 19,000명, 입장객 수는 45,000명이었다. 1939년에 경성역에서는 350만명이 타고 340만명이 내렸다. 비교를 위해 다른 역의 상황을 살펴보면 용산역은 40만명과 50만명, 영등포역은 50만명과 60만명, 청량리역은 35만명과 40만명 선이었다. 4개 역의 이용객 수를 합하면 모두 965만명이었다. 당시 경성의 인구수가 77만명이었으니, 당시 경성 주민의 12배가 되는 숫자다. 당시 사람들에게 경성역은 그만큼 일상적이고 친숙한 공간이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편찬위원회 편, 『주한일본공사관기록』14권, 국사편찬위원회, 1995.
  • 박천홍, 「경성역 잡감(雜感)」, 『철도저널』18(2), 한국철도학회, 2015.
  • 『동아일보』, 1923. 1. 1.
  • 『동아일보』, 1922. 12. 8.
  • 『동아일보』, 1922.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