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길(南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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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5년(선조 28)∼1654년(효종 5) = 60세.] 조선 중기 광해군~효종 때의 문신. 자(字)는 정경(正慶)이고, 호(號)는 안분당(安分堂)이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영해(寧海) 원구리(元丘里)이다. 아버지는 의병장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이준(李濬)의 딸이다. 군기시 주부(主簿)남의록(南義祿)의 손자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7년(광해군 9) 관학(館學) 유생(儒生) 100여 명이 서궁(西宮)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이때 유생의 명단에 남길(南佶)도 들어 있었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25일 3번째기사] 당시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폐모론을 주장하고 정청(庭請) 운동을 일으켜서 서인의 중진을 제외하고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를 폐출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동인의 유생들이 대북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을 지지하고 폐모론에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사마방목>]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서인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서인들이 인목대비의 폐출을 주장한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정거(停擧)하였기 때문에 남길은 과거를 보아 벼슬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 영해 원구리(元丘里)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1624년(인조 2) 아버지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을 위하여 고향 영해 원구리에 난고종택(蘭皐宗宅)을 지었다. 아버지 진사(進士)남경훈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할아버지 판관(判官)남의록(南義祿)를 따라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는데, 그 막하(幕下)에서 왜군과 싸워서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나라에서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으로 녹훈(錄勳)하였기 때문이다. 진사남길은 고향 영해에서 친구들과 시(詩)를 짓고 경전(經典)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효종 시대 활동

1654년(효종 5) 9월 17일에 영해 원구리의 난고구택(蘭皐舊宅)에서 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60세였다.[묘갈명]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빈하고 과묵하여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으나, 집안의 자녀들에게 몸을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도록 가르쳤다.[묘갈명]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서인이 정권을 잡고 대북이 몰락하자, 폐모론에 가담한 동인들도 모두 수난을 당하였다. 이에 남길은 안동 예안에서 고향 영해로 돌아왔는데, 도산 서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에게 시(詩)를 지어서 작별을 고하기를,

백설(白雪)은 기세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고, /白雪調將亂。

청양(靑陽)은 기운이 더욱 추워질 것이므로. /靑陽氣更寒。

풍진(風塵)은 모름지기 각자 보존해야 하며, /風塵須各保。

세상만사는 저절로 다단(多端)해질 것이로다. / 世事自多端。

하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서 각자 알아서 잘 대처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묘갈명]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등이 처음에 인현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글에는 남길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훗날까지 오래도록 가담여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주변에서 과거의 문과(文科) 시험에 응시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남길이 거절하기를, “과거 시험은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이다. 나는 겨우 자기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면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덤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남길은 재리(財利)에 대해서는 아주 초연하였는데, 형제자매와 상속 재산을 분배할 때 똑같이 나누어 주었으며, 외갓집이 부유하였는데, 상속할 아들이 없자, 그 재산을 가난한 이모(姨母)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을철에 노복(奴僕)들이 곡식을 추수하고 떨어진 이삭을 모두 줍지 않아서 손해가 많았으므로, 부인 신씨(申氏)가 이를 말하려고 하자, 남길이 만류하기를, “우리가 가진 것은 저들보다 이미 많지 않는가.”하니, 부인이 웃고 그만두었다. 두 부부는 노복들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어 가서 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웃집에 사는 가난한 부부가 남길에게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어서 울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남길이 두 아들에게 그 채권(債券)을 가져다가 불태워버리게 하였다.[묘갈명]

1624년(인조 2) 남길은 아버지 난고(蘭皐) 남경훈(南慶薰)을 위해서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난고종택(蘭皐宗宅)을 지었는데, 조선 중기 양반가의 생활구조와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건축물이므로, 지금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에 남길이 정침(正寢)과 가묘(家廟)를 지었고, 그 손자 남노명(南老明)이 만취헌(晩翠軒)을 지었고, 남로명의 현손(玄孫) 남두양(南斗陽)이 만취헌을 증수하였다. 종택(宗宅) 경내에는 종가 정침(正寢)⋅태묘(太廟)⋅별묘(別廟)⋅만취헌⋅난고정(蘭皐亭) 등이 있고, 또 종택에는 교지(敎旨) 51건, 전적(典籍) 13점 등 다수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영해 남쪽 간화전(間花田)에 있는데,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해좌집(海左集)』 권27] 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무덤 앞에 묻었다.[『정재집(定齋集)』 권26]

부인 단양신씨(丹陽申氏)는 부정(副正)신효정(申孝男)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를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종사랑(從仕朗)남상주(南尙周)이고, 차남은 진사(進士)남상소(南尙召)이고, 딸은 사인(士人) 장씨(張氏)의 처(妻)이다. 손자로는 병조 좌랑(左郞)남노명(南老明), 순천부사(順天府使)남구명(南九明), 성균관 전적(典籍)남하명(南夏明) 등이 있다.[묘갈명]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사마방목(司馬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만곡집(晩谷集)』
  • 『송사집(松沙集)』
  • 『우암집(寓庵集)』
  • 『정재집(定齋集)』
  • 『해좌집(海左集)』
  • 『활산집(活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