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南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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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6년(명종 11)∼1635년(인조 13) = 80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사헌부 대사헌(大司憲)⋅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다. 자(字)는 계헌(季獻)이고, 호(號)는 용호(龍湖)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공조 참판남응운(南應雲)이고, 어머니 신씨(辛氏)는 신세량(辛世良)의 딸이다. 예조 참판남세건(南世健)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남이공(南以恭)과 사간(司諫)남이준(南以俊)의 막내삼촌이다.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파에 속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데에 앞장섰기 때문에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병자(丙子)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사마방목>]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 문과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문과방목>] 바로 6품의 참상관(參上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92년(선조 25)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당시 의주(義州)로 파천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나, 도중에 어가(御駕)의 행렬을 놓쳐버려서 끝까지 수종(隨從)하지 않았다고 하여, 반대파의 탄핵을 당하여 파직되었다.

1598년(선조 31)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는데, 북인파의 추천을 받아서 청요직(淸要職)에 서용(敍用)되었던 것이다.

1599년(선조 32)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고,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종부시 정(宗簿侍正)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600년(선조 33) 북인(北人)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누어질 때 남근(南瑾)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을 지지하였으나, 조카 남이공(南以恭)은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을 지지하였다. 이때 대북파의 추천을 받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었고, 1602년(선조 35) 호조 참의(參議)를 거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어, 선조의 최측근이 되어 활동하였다.

1603년(선조 36)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04년(선조 37)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었다.

1606년(선조 39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선조는 후궁의 소생인 광해군(光海君)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정궁(正宮)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는데, 소북파 유영경(柳永慶) 등은 이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대북파 정인홍⋅이이첨 등은 이를 반대하고 광해군을 옹호하였다. 이에 선조는 유영경을 영의정에 임명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게 하였다. 선조 말년에 유경경이 대북파를 박해하여, 대북파 정인홍⋅이이첨 등을 조정에서 추방하였다. 이때 남근도 도승지에서 쫓겨나서, 1607년(선조 40) 장래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좌천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2월에 선조가 갑자기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았다.

1610년(광해군 2) 남근은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옮겨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경주 부윤 때 죄를 지은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춘추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그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는데, 이 일에 적극 가담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는데, 그때 예조 판서는 이이첨이었다.

1616년(광해군 8)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을 폐출시키자는 폐모론(廢母論)을 추진하는 데에 대간(臺諫)의 우두머리로서 적극 참여하여, 폐모론에 반대하는 서인파 중진들을 탄핵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 이이첨이 인목대비를 폐출시키기 위하여 문무백관들을 동원하여 대궐의 뜰에 나아가서 광해군에게 인목대비의 폐출을 청원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할 때 대사헌남근은 ‘청정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서인파 중진들을 탄핵하여 모두 축출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한성부 좌윤(左尹)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한직인 돈녕부 지사(知事)로 옮겼다.

1621년(광해군 13)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622년(광해군 14)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2월에 서인(西人)에 의하여 <인조반정> 이 일어나자, 대북파 정인홍⋅이이첨 등은 처형되었으나, 남근은 죽음을 면하고 유배되었다. 그때 나이가 68세였다.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12년 동안 지내다가, 1635년(인조 13) 귀양지에서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80세였다.

후손

부인 이씨(李氏)는 이주(李澍)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남이문(南以文)이고 차남은 남이풍(南以風)인데, 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과거도 보지 못하고 벼슬도 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낙전당집(樂全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사류재집(四留齋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봉유고(藥峯遺稿)』
  • 『역양집(嶧陽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평일기(延平日記)』
  • 『용담집(龍潭集)』
  • 『우복집(愚伏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인재집(忍齋集)』
  • 『청선고(淸選考)』
  • 『청음집(淸陰集)』
  • 『팔곡집(八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