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옥(南宮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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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 12)∼1699년(숙종 25) = 80세.] 조선 후기 인조~숙종 때의 문신. 서화가. 행직(行職)은 예조 정랑(正郎)⋅통례원 통례(通禮)이다. 자(字)는 여상(汝相)이고, 호(號)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함열(咸悅)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사포서 별제(別提)남궁률(南宮嵂)이고, 어머니 한씨(韓氏)는 한옹(韓顒)의 딸이다. 호조 정랑(正郎)남궁집(南宮鏶)의 동생이고,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인(門人) 남궁억(南宮檍)의 3촌이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나고 특히 속필(速筆)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46년(인조 24)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사마방목>]

효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 3)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현종 시대 활동

1669년(현종 10) 예조 정랑(正郎)이 되어, 길재(吉再)⋅김장생(金長生) 등을 제향한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에 경상도 고성현령(固城縣令)⋅평안도 은산현감(殷山縣監)⋅함경도 문천군수(文川郡守)⋅충청도 부여군수(夫餘郡守) 등 군현의 수령관을 일곱 차례나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숙종 시대 활동

1690년(숙종 16) 승문원 판교(判校)가 되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으며, 그 뒤에 통례원 통례(通禮)를 지냈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속필(速筆)로 유명하다. 작품으로 경기 개풍(開豊) 천마산(天摩山)의 「대흥사 중건비문(大興寺重建碑文)」의 글씨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쾌활하여 우스갯소리를 잘 하였다.

남궁옥(南宮鈺)이 나이 27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그보다 5살 연하의 여성제(呂聖齊)도 생원시에 장원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함께 공부하였다. 남궁옥이 우스갯소리를 잘하자, 후배 여성제가 남궁옥을 아주 좋아하고 따랐다. 두 사람은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함께 모여서 선배 남궁옥은 우스갯소리를 하고, 후배 여성제는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拍掌大笑)하였다. 그 뒤에 두 사람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남궁옥이 평안도 은산현감(殷山縣監)으로 있었을 때 이조 판서여성제가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으로 염찰(廉察)하러 나왔다. 두 사람이 오래간만에 만나서 해후하고 술잔을 나눌 때, 여성제가 남궁옥에게 옛날의 우스갯소리를 다시 해보라고 요청하자, 남궁옥이 대답하기를, “소싯적 우스갯소리는 지금 다 잊어버렸다네.”하고, 자기 대신에 기생을 불러서 같이 밤을 지내며 그 기생에게 우스갯소리를 하라고 명하고 자리를 떴다. 그 기생이 밤새도록 여성제의 성씨인 <음률 려(呂)>자를 가지고 세 차례나 우스갯소리를 하며, 여성제를 골려먹였다고 한다. 희천(希天) 여성제(呂聖齊: 1625∼1691)는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인데, 그는 항상 남궁옥(南宮鈺)을 당대 ‘골계(滑稽: 코미디)의 제1인자’라고 치켜세웠다.

부인과 후손

부인 김씨(金氏)는 김대관(金大觀)의 딸이다.[<방목>] 아들 남궁선(南宮僎)은 진사(進士)이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갑봉유고(甲峰遺稿)』
  • 『나은집(懶隱集)』
  • 『서석집(瑞石集)』
  • 『수촌집(水村集)』
  • 『야은집(冶隱集)』
  • 『이계집(伊溪集)』
  • 『전등사본말사지(傳燈寺本末寺誌)』
  • 『호보(號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