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영(南季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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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5년(태종 15)∼졸년미상.]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의 문신. 천문학자. 행직(行職)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병조 정랑(正郞)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남적(南績)이다. 사헌부 지평(持平)남윤종(南潤宗)의 조부이고, 좌의정남지(南智)의 6촌 동생이다. 나이 8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나이 13세 때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천재 소년이라고 일컬어졌다. 나이 17세 때 어머니 3년 상(喪)이 끝나기 전에 혼인하였다고 하여, 세종이 노하여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남계영이 천문 역법에 정통하고 역산(曆算)에 밝다고 하여, 제학정인지(鄭麟趾)와 대제학정초(鄭招)가 남계영을 발탁하여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의 편찬에 참여시켰다.

세종 시대 활동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1등(等)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9세였다.[<사마방목>]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장원하여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 났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많은 유생들이 어린 남계영의 4서(書) 5경(經)에 통달한 것을 보고, 그의 훈고학(訓詁學) 방식에 따라서 경서(經書)를 공부하려고 하였다.

1427년(세종 9) 친시(親試)에 갑과(甲科) 1등(等)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겨우 13세였다.[<문과방목>] 그때 세종이 문과(文科) 초시(初試)에 중시(重試)를 함께 시행하여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정인지(鄭麟趾)가 1등 장원을 차지하였다. 세종이 급제한 사람들에게 은영연(恩榮宴)을 내려주었으므로, 정인지는 어린 남계영 등과 함께 사은(謝恩)하는 전문(箋文)을 지어서 세종에게 올렸다.[『세종실록』 9년 3월 29일 2번째기사]남계영은 과거에 장원 급제 하였으므로6품의승문원 부교리(副校理)에 보임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남계영을 성균관 사유(師儒)의 직임에 임명하여 달라고 예조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어린 천재 남계문을 집현전 학사(學士)로 발탁하려고 생각하였다.

1430년(세종 12) 나이 16세 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1년 기년(期年)을 끝마쳤다. 당시 서민들은 어머니 상기(喪期)를 기년으로 끝마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1431년(세종 13) 나이 17세 때 아버지 남적(南績)이 아들의 혼기(婚期)를 놓칠까봐 걱정하여 아들에게 혼인하도록 강권하여, 남계영이 부인 이씨(李氏)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남계영이 어머니 3년 상(喪)을 마치지 않고 혼인하였다고 하여,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간(臺諫)에서 남계영을 탄핵하고, 예조 판서신상(申商)이 이를 세종에게 자세히 보고하자, 그때 어머니 3년 상(喪)을 법제화하려고 하던 세종은 벼슬에 영원히 서용(敍用)할 수 없게 하는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처벌을 본보기로 남계영에게 적용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남계영은 영원히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이후 남계영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남계영의 재주가 아깝다고 생각한 효령대군은 세종에게 은근히 남계영을 칭찬하고 천거하였으나, 세종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세종은 남계영이 종친에게 빌붙어서 관직을 구한다고 오해하고 그를 더욱 나쁘게 여겼기 때문이다.

1432년(세종 14) 대제학정초(鄭招)⋅제학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에게 남계영을 발탁하여 천문(天文) 역법(曆法) 연구에 쓰도록 강력히 건의하였다. 정초와 정인지는 남계영이 천문학에 뛰어나고 역법(曆法)의 수치에 정밀하다고 칭찬하고, 천문 역법(曆法)을 개편하는 데에 남계영과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지신사(知申事: 도승지)안숭선(安崇善)과 좌대언(左代言: 좌승지)김종서(金宗瑞)도 남계영이 혼인할 때 나이가 불과 17세였으므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변호하자, 세종도 남계영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나이에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여 혼인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계영을 용서하여 주었다. 이에 남계영은 역법(曆法)을 연구하는 데에 참여하여, 역법을 교정(校正)하였다.그때 정초와 정인지는 왕명을 받고 중국 명(明)나라의 『칠정추보(七政推步)』⋅『대통통궤(大統通軌)』⋅『태양통궤(太陽通軌)』⋅『태음통궤(太陰通軌)』와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 등의 역서를 연구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남계영도 이에 참여하였다.

1434년(세종 16) 나이 20세 때 남계영은이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고열(考閱)하고 해설한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할 때 그 교열(校閱)하는 데에 참여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26일 2번째기사]

1438년(세종 20) 병조 정랑(正郞)이 되어, 도성문(都城門) 출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장형(杖刑) 1백 대를 맞고 파직하게 되었으나, 세종이 장형을 대속(代贖)시키고 본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남계영은 이조 좌랑과 병조 정랑 등의 화직(華職)에 서용(敍用)되었으나, 예문관의 관직을 겸직하여 천문 역법을 연구하고 해설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442년(세종 24) 원나라의 『수시력』을 연구 해설한 『칠정산내편』이 완성되었고, 1444년(세종 26)에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연구 해설한 『칠정산외편』이 완성되었다. 단종 때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은 『세종실록』에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1449년(세종 31)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성균관에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였는데, 훈고학(訓詁學)에 밝아서 구두점(句讀點)을 정확히 찍고 그 뜻을 명확하게 해설하여 많은 유생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단종 때 남계영은 외직으로 나가서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서,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방목]

세조 시대 활동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세종 시대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수많은 명신(名臣)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집현전 학사(學士)를 중심으로 세조에 저항하다가 다수의 사람들이 죽었으나, 예문관 직제학남계영은 예문관 학사들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오로지 문학(文學)을 연마하거나 천문 역법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도록 독려하였다. 예문관은 문학을 주로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남계영은 성리학(性理學)에는 정통하였으나, 문학(文學)에는 별로 소양이 없었다. 일찍이 윤계영이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시집을 읽다가 말하기를, “이 책은 내용이 없고 부실하다. 사람을 미혹하게 하고 내용도 긴요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하고, 드디어 읽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10]

1460년(세조 6) 봉상시 주부(注簿)가 되었는데, 세조가 자기를 옹립한 사람들을 <정난(靖難) 공신>과 <좌익(佐翼) 공신>으로 책봉하고, 그 나머지 대소 관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책봉할 때 남계영도 원종공신 3등에 봉해졌다. 이후 남계영의 활동은 실록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만년의 발자취와 졸년은 알 수 없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명쾌하고 정밀하여 사람들이 취할 바가 많았다.

1431년(세종 13) 11월에 세종이 경연(經筵)에서 『육전(六典)』을 강론하다가, ‘아버지가 생존해 있으면, 어머니의 상기(喪期)는 기년(期年)으로 하지만, 마음속으로 3년 동안을 애모(哀慕)한다.’는 조문에 이르러, 세종이 말하기를, “근일에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어머니의 상기(喪期)는 기년(期年)을 폐지하고 3년 상기로 정하자고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기년은 태종 때 만든 법이므로 갑자기 개혁할 수가 없어서, 내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에 기년이 지난 뒤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장가를 간 사람까지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장가간 그 이유를 따져서 물었더니, 장가간 사람이 대답하기를, ‘아버지의 명령이다.’라고 하였으나, 3년 안에 아들이 장가들도록 허락하는 것은 그 아버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장가간 사람을 영구히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경연에서 어머니의 상기(喪期)를 기년(期年)으로 할 것인지, 3년으로 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세종이 남계영(南季瑛)을 실례로 들어서 말한 것이다. 어머니의 상기를 3년으로 정할 것을 주장하는 세종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남계영은 어머니가 죽은 지 3년 안에 이중만(李仲蔓)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비록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남계영이 울면서 하소연하였다면, 아버지도 천리(天理)가 있는데, 어찌 아들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겠는가. 남계영은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하였다.[『세종실록』 13년 11월 8일 1번째기사]

1432년(세종 14) 10월에 예조 판서신상(申商)이 아뢰기를, “사헌부 감찰(監察)남계영(南季瑛)은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교훈을 받은 성균관 유생(儒生) 1백여 명이 예조(禮曹)에 글을 올리기를, ‘남계영에게 성균관 사유(師儒)의 직임을 주도록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남계영의 과실을 전하께 자세히 말씀드린 적이 있었으므로 그때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남계영은 일찍이 효령대군(孝寧大君)에게 붙여서 대군의 아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대군이 나에게 그를 서용(敍用)하도록 청하였으나, 내가 대답하기를, ‘어머니 상(喪)을 당한 지 3년 안에 장가를 들었으니, 선비로서 행실이 좀 모자랍니다.’고 하였다. 남계영은 스스로 변명하기를, ‘아버지의 분부 때문에 부득이하여 장가를 갔던 것이며, 저의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남계영이 의리로써 굳게 사양하였다면, 아버지인들 어찌 억지로 장가가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가령 아버지의 분부 때문에 거역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또한 어찌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아들의 상기(喪期)를 자기 마음대로 줄이도록 할 수 있겠는가.”하고 세종은 단호하게 말하기를, “남계영은 비록 훈고학(訓詁學)에 밝아서 구두점을 잘 찍는 잔재주는 있지만, 모름지기 어머니에 대한 효행(孝行)이 없으니, 어찌 관리로 서용하여 화직(華職)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0월 10일 6번째기사]

1432년(세종 14) 11월에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정초(鄭招)와 예문관 제학(提學)정인지(鄭麟趾) 등이 왕명을 받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천문 역법에 정통하고 역산(曆算)에 정확한 남계영을 등용하려고 하였다. 이때 세종이 대언(代言)들에게 말하기를, “해와 달의 역상(曆象)을 관찰하는 것은 고금의 제왕(帝王)들이 귀중하게 여겼다.”하고, 대제학정초⋅제학정인지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역법(曆法)을 맡아보는 관원들이 침체되어 있어서 역법을 연구하는 데에 힘을 쓰지 아니하니, 지금 초자(超資)하여 화직(華職)에 임명하면 어떠하겠는가.”하니, 정초 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좌대언(左代言)김종서(金宗瑞) 등이 아뢰기를, “정초⋅정인지 등이 하소연하기를, ‘현재 역법을 교정하는 전 사헌부 감찰남계영은 천문 역법에 정통하고 또 역산에 정밀하나, 어머니 상(喪) 중에 혼인을 하였다고 하여, 침체되어 서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고 하였는데, 신 등의 생각으로는 중국은 천하의 넓고 큰 나라이지마는 오히려 인재를 아끼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에서는 인재가 적게 나므로 남계영과 같은 자도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 남적(南績)이 광질(狂疾)이 있어서 억지로 아들을 장가들게 하였으니, 남계영의 죄는 아닙니다. 남계영이 혼인할 때의 나이는 겨우 열 일곱 살이었으므로 사리(事理)를 잘 알지 못할 때이니, 용서하고 서용(敍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잇달아 안숭선이 아뢰기를, “남계영의 사람됨이 취할 만한 바가 많으니, 모름지기 서용(敍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가 실상은 정말 쓸 만한 인재이다. 더구나 나이가 겨우 열 일곱 살이었다면. 사리를 잘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용서할 만하니, 후일에 크게 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1월 1일 5번째기사] 그 뒤에 남계영은 이조 좌랑(佐郞)⋅병조 정랑(正郞) 등 화직(華職)에 임명되어, 예문관의 천문⋅역법을 연구하는 관직을 겸임하여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으며, 나중에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맡아서 천문 역법의 연구와 편찬을 직접 관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1438년(세종 20) 병조 정랑(正郞)이 되어, 서울 도성(都城) 4대문의 출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장형(杖刑) 1백 대를 맞고 파직당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세종이 강무(講武: 군사 훈련)를 하기 위해서 서울 도성(都城)을 떠나서 경기 원평(原平) 광탄(廣灘)에서 강무하고 황해도 해풍(海豊) 온정(溫井)까지 행차하였다가 돌아왔는데, 백관(百官)들과 군사들이 호종(扈從)하였다. 중추원사(中樞院事) 한확(韓確)도 거가(車駕)를 따라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경기 양주(楊州)에 이르렀을 때 그 장인 이조 판서홍여방(洪汝方)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한밤중에 어둠을 무릅쓰고 말을 달려서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도성의 4대문이 닫쳐서 들어갈 수 없었다. 한확이 4대문을 지키는 진무(鎭撫) 이연기(李衍基)와 병조 정랑남계영에게 간청하였으나, 4대문을 출입하는 표신(標信)이 없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한확이 강청(强請)하다가 협박까지 하였으므로, 이연기와 남계영이 하는 수 없이 도성문을 열어 주었다. 이에 환확이 밤중에 서울에 들어가서 장인 초상(初喪)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얼마 후에 그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이연기와 남계영 등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아뢰기를, “한확은 마음대로 도성문을 열고 들어갔으며, 이연기와 남계영 등은 한확의 강청을 받아들여 마음대로 도성문을 열어주었으니, 법대로 처리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이 명하여 한확은 관직을 파면하고, 남계영과 이연기는 모두 형장 1백 대를 대속(代贖)하게 하고 본직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0년 10월 19일 1번째기사] 한확은 세종 때 병조 판서⋅이조 판서를 지냈고, 세조 때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후손

부인 이씨(李氏)는 이중만(李仲曼)의 딸이다.[<방목>]

아들은 남손(南蓀)이고, 손자 남윤종(南潤宗)은 문과에 갑과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견한잡록(遣閑雜錄)』
  • 『관란유고(觀瀾遺稿)』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